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G단조 Op.65
Fryderyk Franciszek Chopin 1810-1849
1 Allegro moderato
2.Scherzo - Allegro con brio
18세기 최고 휴머니스트 드라쿠르와作
1834년 조르드 상드,
1838년 쇼팽 프레드릭 쇼팽(1810~1849)은 리스트 보다 한해 먼저 태어났다.
20세에 러시아 지배하의 폴란드를 떠나 파리에 입성했다.
친구들 주선으로 고별 연주회가 있었다.
그는 피아노협주곡 1번을 연주했다.
바르샤바 음악원 시절 제자 콘스탄치아는 로시니의 호반의 미인중 카바티나를 불렀다.
은잔에 담아온 흙 그녀의 리본을 평생 간직했고,
결국 그 흙은 파리 장례때 가슴에 뿌려졌다.
파리서 폴란드 귀족 딸인16세의 마리아 고진스키를 흠모했으나
드레스텐으로 가버렸다.
그녀를 위해 이별의 왈츠를 선물했다.
마리아는..
음악,시,그림에 뛰어났는데 쇼팽 초상화도 그렸다.
드라쿠르아 것과 더불어 쇼팽 2대 초상화이다.
드라쿠르아는 1838년 쇼팽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쇼팽을 만나기 전 조르주 상드를 1834년에 먼저 만났다.
되몽드' 잡지의 편집장은 독자들을 위해 상드의 초상을 들라크루아에게 부탁했다.
그래서 상드는 센 강변의 볼테르街
들라크루아 아틀리에에 자주 들렀다.
쇼팽이 파리 음악계,사교계에 안착하는데에는 리스트의 가이드가 있었다.
그래서 쇼팽은 연습곡집 1번은
리스트에 2번은 다구에 헌정했다.
호탕하고 외향적인 리스트, 섬세하고 내향적인 쇼팽이였다.
베를리오즈는 쇼팽에 죽을 때 까지 다정다감했다.
한번은..
무대 불도 켜지않은채 리스트 독주회가 열렸다.
연주가 끝날 무렵
상드는 뒤에서, 촛불을 두손에 움켜쥐고 피아노 쪽으로 다가왔다.
관객들 탄성이 터져나왔다. 촛불에 비친 얼굴은 리스트 아닌 쇼팽이였다.
리스트와 상드가 쇼팽을 돋보이게 하려는 즉석 이벤트였다.
노앙에서의 쇼팽과 상드 쇼팽에 있어 상드는 어머니 품이였다.
여성이 남성을 이끈다'했던가!
쇼팽에게는 상드가 그랬다.
26살 되던해 쇼팽은6살 연상에 두 자녀를 둔 상드(1804~1876)와 세기적 사랑에 빠진다.
둘이 처음 만난 곳은 마리 다구 집이였다.
쇼팽은 마리아로인해...
마음의 상처가 남아있던 시기였다.
상드는 쇼팽을 얻기 위해 다구에 많은 조언을 구했다.
쇼팽은 처음에는 탐탁치 않아했으나 2년에 걸친 헌신적인 구애에 마음도 움직였다.
쇼팽,상드와 열애에 빠지다!
당시 언론 한토막이다.
당시 사람들은 상드를 여류 돈후안이라 불렸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것이..
19세기 사람이지만 이미 21세기를 산 상드였다.
불성실한 첫 남편과이혼을 위해 교회에도 저항했다.
여류 돈후안'이라는 등식은 남성적 시각일 뿐이다.
그녀는 만나는 남자마다 모성애로 최선을 다했다.
쇼팽과 해어진 후 만난 연하의 조각가 망소가 성공했던 데에도
상드의 헌신이 있었다.
상드는..
90여권의 저서를 남기며 경제적 자립에 노력했다.
실제적인 최초 커리어 우먼이었는지도 모른다.
남성 패권의 예술계는,
그녀를 남장에 시가를 물게했다.
당시 파리서 카페는 문화,예술의 용광로였다.
사람들은 모여 토론하고 사고했다.
그러나 카페에 여성은 없었다.
당시 사교 살롱에 익숙한 귀부인들은 신생 카페에 들렀다 줄행랑을 쳤다.
날카로운 시대적,문학적 토론에 기가 죽어서이다.
카페에서 유명 여성으론 상드가 최초였다.
할머니 밑에서 자랐고 수녀원에 들어가 신비주의에 빠지기도했다.
유난히 자연,어린이,농부를 좋아했다.
주민들은 그녀를 노앙의 착한 여인으로 불렀다.
발자크,위고,드라쿠르와 등 당대 지성과 어깨를 나란히했으며
혁명기에는 민중의 편에 섰다.
러시아 뚜르게네프,바쿠닌을 소개하기도했다.
리스트 연주에 감동 피아노 밑으로 기어들어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나의 가슴은 언제나 붉은 색이였다"
죽기 2주전 남긴 말이다. '팜브 파탈'남자에 치명적인 여성을 말한다.
흔히들 상드-쇼팽' 관계도 그렇게 말하곤했다.
그러나 쇼팽에 있어 상드는 축복이였다.
파리 입성 후 2년만에 상드를 만났다.
만난지 2년만에 열애에 빠졌고 헤어진 후 2년만에 죽었다.
빗방울 전주곡은 쇼팽이 그녀에게 얼마나 의지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랑에 빠진후 지병인 결핵도 도졌다. 겨울이라...
따스한 지중해 마조르카 섬으로 요양을 떠났다.
당시 폐병은 흑사병 처럼 두려운 전염병이였다. 우기가 겹쳐 기침이 심해졌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
결국 일주일만에 인근 폐수도원으로 옮겼다.
당시 생활상은 상드의 섬에서의 한철에 잘 묘사되어 있다.
상드는 인근 마을로 생필품을 사러갔는데 밤이 깊어가도 돌아오지 않았다.
불안해진 쇼팽은 연신 기침을 했다.
시간을 잊으려는듯 피아노에 열중했다.
이윽고 비에 흠뻑 젖은 상드가 들어왔다.
쇼팽의 멘트가 슬프다.
당신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며 작곡했지,,,
" 당시 상드가 쇼팽에 어떤 존재였는지 다음의 쇼팽 글을 보면 잘 알수있다.
너를 위하여 나는 땅바닥을 기여도 좋다.
너를 위해서만 음악을 울리고 싶다.
사랑하는 이여,
너의 흐린 ... 상드 별장이 있는 고향 노앙으로 돌아온다.
노앙엔 친구들도 자주 들렀는데 절친했던 드라쿠르와는 회상록에서 이리 술회했다.
상드는 소설을,쇼팽은 작곡을,나는 그림을 그렸다.
많은 남자를 섭렵한 그녀가 어떻게 저리 얌전할수 있을까?
분명 음악적 영감을 얻고있을 게다.
근데 요즘 발자크는 왜 안오는 거지? 모두들 행복해 하는데,,,
쇼팡은 상드와 헤어지고 2년을 더 살았다.
살았다지만. .. 그것은 덤의 인생에 불과했다.
쇼팽은.. 제자 초청으로 영국으로 건너갔고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 연주도 했다.
그러나 영국의 습한 공기는 병을 악화시켰고
파리로 돌아와 죽음을 맞았다.
쇼팽은 사망 두달전 파리에서 첫 사랑이였던 델피아에게
단테 신곡의 다음 구절을 적어주었다.
결국 상드가 아닌 그녀 품에서 죽었다.
불행할때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것 보다 슬픈 것은 없다"
쇼팽은 하이네,멘델스존을 좋아했고 특히나 모짜르트 음악을 사랑했다.
죽기 직전 모짜르트 음악을 들려 달라고했고
장례식 때 모짜르트 레퀴엠 연주를 유언했다.
모짜르트 레퀴엠은...
슈베르트,흄멜 장례식 때도 연주되었다.
어머니,
불쌍한 나의 어머니!!"
38세 쇼팽의 마지막 말이다.
마들렌 성당서 보름만에 장례식이 치뤄졌는데 수천명이 애도했다.
관이 성당에 들어오자 마이어 베이 지휘로
그의 소타타 2번 3악장 장송행진곡이 관현악 편곡으로 울려 퍼졌다.
드라크루아는 참 인간적이였나 보다.
그 열광하던 파리 여성들도 쇼팽이 폐인으로 돌어오자 모두를 고개를 돌렸다.
쇼팽은 사망 2년전 상드와 헤어졌고 들라크르와는 위로차 자주 그를 찾았다.
당시 그의 일기는 쇼팽 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들라크르와는 쇼팽이 죽은지 12년이 지났는데도
그의 부재를 일기에서 이렇게 아쉬워했다
대체 누구와 함께 쇼팽과 같은 천재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까요?
하늘이 우리에게 마지 못해 보내준 사람,,
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고 신성한 멜로디를 들을수 없기에
더욱더 그를 생각하게 됩니다.
마들렌 성당서 열린 장례식 실제적 상주는 드라쿠르아였다.
[Bochum:scholle/16.11.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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