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Tchaikovsky (1840∼1893)

차이코프스키 / 폭풍 서곡 / Overture 'The Storm', Op.76

scholle 2010. 2. 18. 03:35

 

 

Overture 'The Storm', Op.76 차이코프스키 / 폭풍 서곡

Pyotr Ilich Tchaikovsky (1840∼1893)

 

[20세기 오페라 - 러시아 오페라]

19세기 말에 전위로서 위치하는 러시아 악파는 반성의 한시기에 있었다.

민간 전승의 서사적 동화는 여전히 이용되고 있었으나

아렌스키(1861-1906)의 라파엘(1894)이나

박학한 세르게이 타네예프(1856-1915)의 매우 아름다운 오레스테아(1895)와 함께

다른 테마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 그레차니노프(1864-1956)의 사랑스런 도브리니아 니키티치(1903)등에서는 그

것은 좀 형태를 바꾸어 나타나고 있다.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레비코프 (Vladimir Ivanovich Rebikov,폭풍 속에서[1894])

니콜라이 체레프닌에서는 프랑스의 영향이 느껴진다.

 

한편 루프 Ruf'(1887)나 아차 Atya(1900)를 쓴

이폴리토프 이바노프(1859-1935),

세르게이 니키포로비치 바실렌코(Sergei Nikiforovich Vasilenko),

코로스첸코(Koroschenko),

루이센코(Luisenko),

바실리 파블로비치 솔로비요프 세도이 (Vasilii Pavlovich Solov'ëv Sedoi) 및

그루지아인

자하리 페트로비치 팔리아시빌리 (Zakharii Petrovich Paliashvili, 압살론과 에테리[1919])

등에게 있어서는 지방의 특색이 잘 반영되어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영향이 강한 것은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칼린니코프(Vasilii Sergeevich Kalinnikov), 보리스 황제[1897])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이다.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으로는 알레코(1892)와 그것에 이어지는

대담한 드라마 인색한 기사(1899-1904),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1906)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류의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고

다양한 국제색의 풍부한 재능을 펼친 것이 스트라빈스키와 프로코피에프이다.

 

스트라빈스키는 밤 꾀꼬리(1914 파리)에서

부분적으로 림스키 코르사코프를 원용하고 있으며,

마음에 드는 소극(笑劇) 마브라(1922)에서는 글린카와 다르고미슈스키를 이어놓고 있다

 

그 뒤 1951년에 과거의 모든 어법의 깊은맛이 있는

파스티쪼 난봉꾼의 행각을 베네치아에서 영어로 초연하였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1891-1953)는

노름꾼을 쓴 뒤 러시아를 떠나 시카고에서 카를로 고치(Carlo Gozzi)원작의

풍자적인 희극 3개의 오렌지에의 사랑(1921)을 프랑스어로 상연했다.

 

그리고 1927년에 극적으로 불의 천사를 완성했는데

이 작품은 후에 이탈리아 및 프랑스에서 상연되었다.

소비에트로 돌아온 뒤로는 시메온 코트코(1939)에서 민중의 인간성을 찬양하고

수도원에서의 약혼(1940-41)에서는 유머로 돌아갔다.

그리고 전쟁과 평화(1941-52)에서는 서정시적 재능을 나타냈다.

 

40년 동안 매우 풍부한 오케스트라의 색채를 갖춘

변함없는 자연스런 선율의 자질에 충실했던 프로코피에프는 ...

푸치니와 야나첵, 슈트라우스와 아울러 20세기의 위대한 고전파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탄생 때부터 자기 나라의 참다운 음악가들을 빼앗기고 있던

소비에트 연방은 순종하기는 했지만

너무나 시대 착오적인 글리에르(1875-1956)에게만 기댈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세대가 만들어 내야 하는데

이윽고 그 세대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75)라는 압도적인 천재에 지배받게 되었다.

쇼스타코비치는 1928년에 고골리의 코에서 착상을 얻어

유럽 전체의 수준에서도 지금까지 없었을 만큼의 대담하고 풍자적인 작품을 써냈다.

 

후에 스탈린이 서정적인 강도에 찬 걸작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1934)을 비난하자

자작을 손보지 않을 수 없게된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1959])

그는 유머러스한 오페레타로 돌아갔다.

그리고 노름꾼의 완성을 포기했다.

 

정부의 방침은 누구로부터 재능을 빼앗는 것이 아니었으며,

신체제에 의해서 착상을 얻은 최고의 작품은 민주화의 엄한 명령이전에

씌어진 의 폴리나 괴블(1925)로 이어졌다.

 

이 작품은 그 후 1938년에 <데상브리스트>라고 제목을 고쳤는데

이러한 예는 과거에도 위그노 교도에서 토스카에 이르기까지

숱하게 있었던 일이다.

 

판첸코(Panchenko)나 트리오딘(Triodin), 글라트코프스키(Gladkovskii),

프루사크(Prussak) 등이 잠깐 사이에 쇠퇴해 버린

소박한 미학에 따르고 있었고,

한편에서는 착상의 테마의 방향을 바꾸려는 시도가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것은 시쇼프(Shishov),

포토츠키(Pototskii), 크레인(Krein), 바실렌코(Vasilenko) 등의 오페라인데,

특히 레프 콘스탄티노비치 크니페르 (Lev Konstantinovich Knipper,1898-1974)의

<북풍>(1930)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이반 이바노비치 제르진스키 (Ivan lvanovich Dzerzhinskii)의

매우 딱딱한 (고요한 돈 강)(1935), 시슈코(Shishko)의 <포템킨>(1937),

젤로빈스키(Dzelobinskii)의 <어머니>(1939),

참을성 있고 한결같은 티혼 흐레니코프(1913- )의 폭풍속으로(1939)조차도

엄격한 아카데미즘 때문에 무해무덕하고 무덤덤한 작품이 되고 있었다.

 

드미트리 카발레프스키의 코라 브뢰뇽(1938)이

이 감상적인 민간전승을 더욱 강하게 주장한 뒤에 전쟁 중에는...

기악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최고의 음악가들은 대본에 과해진

규범을 벗어날 수 있게되었다.

 

이윽고 어느 정도 어법이 자유화되자

새로운 세대는 조심스럽게나마 해방의 시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Bochum:scholle/17.02.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