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D, Shostakovich (1906~1975 )

쇼스타코비치 / 현악4중주 7번-String Quartet No.7 in F# minor, Op.108

scholle 2010. 5. 25. 02:42
String Quartet No.7 in F# minor, Op.108 쇼스타코비치 / 현악4중주 7번 Dmitri Shostakovich (1906~1975) Le Quatuor Komitas 1960년에 완성하여 그해 5월 15일 레닌그라드에서 베토벤 4주우주단에 의해 초연된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4중주 7번 F#minor Op.108"는 특이하게도 3악장 형식을 취하고 있다. 1954년 운명을 달리한 첫번째 부인을 추도하키 위하여 작곡되었으며 그녀에게 헌정되었다. 1악장 (Allegretto)Le Quatuor Komitas 2악장 (Lento) 3악장 (Allegro - Allegretto) Dmitrii Dmitrievich Shostakovich (1906∼1975) 소련 작곡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광산기사로서 음악애호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9세 때 어머니에게 피아노 초보교습을 받은 뒤 1919년에 페트로그라드음악원에 입학하여 L. 니콜라예프에게 피아노를, M. 스타인베르크에게 작곡을 배웠으며 25년에 졸업하였다. 26년 졸업작품 (교향곡 제 1번)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되어 성공을 거두었고, 그의 명성을 높였다. 다음해에는 쇼팽국제콩쿠르에서 명예상을 받았고 그 후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하였다. 계속하여 10월혁명에 붙인 (교향곡 제 2 번(1927)) 메이데이를 위한 (교향곡 제 3 번(1929))을 발표하여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또 이 시기에는 많은 영화음악에도 손을 대었다. 34년에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부인 (1963년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로 개정 초연)이 초연되어 호평을 받자 유럽을 비롯하여 미국에서도 잇따라 상연되었는데... 이 오페라에서 사용되었던 전위적 수법은 36년 1월 (프라우다)지에서 철저한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쇼스타코비치는 37년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방침에 따른 작풍으로 (교향곡 제5번)을 작곡하여 압도적인 성공으로 명예를 회복하였고, 그 후에도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면서 레닌그라드음악원·모스크바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후진을 지도하였다. 제 2 차세계대전후 다시 서구 부르주아적 형식주의에 빠졌다고 A.A. 주다노프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그는 평이한 어법으로 소련의 국토개조계획을 칭찬한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1949)를 발표하였다. 다시 53년 I.V. 스탈린 사후에 발표한 교향곡 제10번에서도 논쟁을 일으키는 등 늘 화제대상이 되면서 정력적으로 대작을 작곡하였다. 소련의 이른바 해빙기를 맞아 60년대부터는 반체제적 텍스트를 사용하고, 내용도 사색적인 경향을 취하는 등 새로운 전개를 보였다. 작품은 오페라·발레음악·영화음악과 극의 부수음악을 포함하는 관현악곡·협주곡· 실내악곡 외에 피아노독주곡과 가곡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특히 극음악의 작품이 많으나 내용과 밀도에서 교향곡과 현악 4 중주곡이 창작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5곡이 넘는 교향곡은 생애를 통하여 몰두하였던 장르로 모두가 대작인 동시에... 작곡가가 놓였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한 작품으로서 매우 흥미로운 점을 지니고 있다. 전 15곡의 현악 4 중주곡은 후반에 집중 작곡했으며, 매우 세련되고 충실한 내용을 보여 B. 바르토크의 현악 4 중주곡과 함께 20세기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 작풍은 서유럽의 모더니즘 영향을 받았던 1920년대, 다시 서방측의 새로운 기법에 접근했던 말년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30년 스탈린에 의한 형식에서 민족적, 내용에서 사회주의적으로 요약되는 정치적 요구에 따라 ... 평이한 신고전주의적 양식을 취하면서 장대한 효과를 올렸다. 그의 사후 수년 후에 발표된 (쇼스타코비치의 증언)은 그의 숨겨진 내면을 알수있는 실마리로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1922년∼27년까지 결혼 전 사랑하던 타디야나 글리벤코에게 보낸 편지가 91년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Bochum:scholle/24.05.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