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stav Mahler (1860∼1911)

말러 / 교향곡 제2번 "復活" -Symphony No.2 in C minor "Resurrection"

scholle 2010. 8. 6. 06:45

Symphony No.2 in C minor "Resurrection"

Gustav Mahler (1860 ~1911) 

(전악장 연주)

 

Symphony No. 2 in C minor ("Resurrection") 1:25:29

 

Performed by Wiener Philharmoniker,

Wiener Singverein, Nadja Michael,

Johannes Prinz; Latonia Moore Conducted by Gilbert Kaplan Label: Deutsche Grammophon Audio CD Date: November 30, 1999 Symphony No.2 in C minor - "Resurrection" 1st Movement - Allegro maestoso (Totenfeier)

 

1. Allegro maestoso

2. Im Tempo nachgeben

3. Wie zu Anfang

4. Sehr mässig und zurückhaltend

5. (English horn, cor anglais)

6. Ausdrucksvoll (English horn &bass clarinet)

7. Etwas drängend

8. Schnell

9. Sehr langsam beginnend

10. Sehr getragen (Trumpet & trombone Posaune)

11. Molto pesante

12. Tempo

13. Zurückhalten

14. Tempo sostenuto Symphony

 

No.2 in C minor - "Resurrection" / 2nd Movement - Andante moderato

1. Andante moderato

2. Nicht eilen. Sehr gemächlich

3. In Tempo I zurückkehren

4. Tempo I. Energisch bewegt

5. 3 bars before Wieder ins Tempo zurückgehen. Tempo

 

Symphony No.2 in C minor - "Resurrection" / 3rd Movement - (Scherzo)

6. In ruhig fliessender Bewegung

7. (Bassoon & violas, altos)

8. (Piccolo)

9. (Cellos &Basses)

10. Vorwärts

11. Sehr getragen und gesangvoll

12. Zum Tempo I. zurückkehren

13. (Trumpets & trombones)

14. (Violas, cellos &basses)

 

Symphony No.2 in C minor - "Resurrection" / 4th Movement

15. "Urlicht" - Sehr feierlich, aber schlicht (Choralmässig) Nadja Michael

Symphony No.2 in C minor - "Resurrection" / 5th Movement

16. Im Tempo des Scherzos. Wild herausfahrend

17. Langsam

18. Langsam

19. (Trombone)

20. Im Anfang sehr zurückgehalten

21. Wieder sehr breit

22. Ritenuto

23. Wieder zurückhaltend

24. Sehr langsam und gedehnt ("der grosse Appell")

25. Langsam. Misterioso (Chorus: "Aufersteh'n") Latonia Moore

26. Etwas bewegter (Solo: "O Glaube") Latonia Moore

27. Mit Aufschwung, aber nicht eilen (Duet: "O Schmerz") Latonia Moore

28. Pesante

 

아마추어가 아닌,

전문 연구가의 말러 부활'교향곡 - 카플란이 펼치는 '부활'의 메세지.

말러 해석의 권위자 카플란이 펼치는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의 완벽 버전.

1910년 개정판을 염두에 둔 말러의 자필 메모를 바탕으로

500여 곳을 검토한 후 최초 공개되는 카플란의 역작.

말러의 자취가 흠뻑 묻어있는 빈 무지크페라인에서 녹음.

'말러의 악기'라고 불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빈 징페라인과의 연주.

뉴욕 타임즈 선정 '올해의 앨범'

 

'말러의 자필 교정'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는 새 음반의 핵심에 이르지 못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카플란의 새 음반이 새로운 관현악 총보를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카플란은 말러 자신이 사용했던 '부활'의 악보를 가지고 있었다.

말러는 이 악보 위에 자필로 수많은 메모를 적어넣었다.

 

1910년 개정판 악보를 만들기 위한 메모가 대부분이었지만,

이 메모를 바탕으로 인쇄된 말러 자신의 '개정판'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말러의 의도에 더욱 다가가기 위한 카플란의 작업에 2

000년 음악 학자 레나테 스타크보이트가 가세했다.

두 사람은 말러가 개정하고자 의도했던 500여개의 부분을 꼼꼼히 찾아내 검토했다.

 

"처음 듣고서 놀랄 만한 변화를 확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카플란은 말한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플루트로 연주돼온 부분이

트럼펫으로 바뀐다던가 하는 부분은 없다.

그러나 사소하다고 할 수 없는 잘못된 악상표시, 강약표시,

음높이의 잘못 등이 크게 교정됐다.

"말러는 항상 작은 부분을 중시했고, 작품이 발표된 뒤 미세한 부분의 개정에

항상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미세한 부분이야 말로 말러를 말러답게,

또한 지금까지보다 더 말러답게 만들 수 있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카플란의 레퍼토리는 '부활'에 한사코 머물러있다.

예외가 있다면 1992년, '장례식풍'으로 지나치게 느린 연주경향에

일침을 가하기 위해 녹음한 5번 교향곡의 4악장 '아다지에토' 정도다.

 

또 하나의 예외로, 사적인 축하자리를 위해 한두번 지휘한

생일축하 노래(Happy Birthday)가 있을 뿐이다.

앞으로는...!!

그는 언제까지나 힘닿는 한 자신의 '부활'을 '더더욱 말러답게' 만드는 작업에 몰두 할 것이다.

머지 않아 그는 자신의 일생을 기울여온 작업을 서울 음악팬들 앞에

직접 소개하게 될 지도 모른다.

"베이징, 샹하이, 타이페이, 싱가포르, 도쿄, 마카우에서 '부활'을 연주했다.

한국은 내게 남겨진 중요한 무대 중 하나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글 : 유윤종

29. "Urlicht" - Sehr feierlich, aber schlicht (Choralmässig) Nadja Michael

'두 차례의 레코딩' 길버트 카플란의 음악인생에 전기가 된 것은

1988년 '부활' 교향곡의 음반 발매였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런던 심포니 코러스가 협연한 이 음반은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말러 음반으로 기록된다.

미국과 영국에서 클래식 차트 1위에 오른 이 음반은

2년동안 차트에 머물렀고 지금까지 18만장 가까운 판매기록을 세웠다.

 

1998년에는 1992년 발매된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 등을 첨부한 새 에디션으로 선을 보였다.

첫 번째 음반으로 듣는 카플란의 '부활'은 오래동안 단 한 곡의 악보에

천착한 지휘자답게 디테일이 돋보인다.

 

반면 이렇다할 개성을 찾기 힘들어 '흠잡을 점도,

강력한 매력도 없는 말러'라는 지적도 이 음반을 따라다녔다.

번스타인의 고도로 감정적이고 열정적인 지휘도,

불레즈의 쿨하고 깨끗한 말러도 다 인정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두 가지 말러 해석은 모두 일종의 극단을 대변한다"고 카플란은 말한다.

그러나 첫 번째 녹음 당시 카플란은 이 작품의 전곡지휘 경험이 단 5회였다.

"그 동안 내 지휘에는 여러 가지 기법상의 진전이 있었다."라는 말로,

그는 첫 녹음의 '중립성'이 자기 개성을 관철시킬 '수단'의 부족과도

관련된 문제임을 밝혔다.

 

그가 DG와 녹음한 새 음반은

그러나 단지 '지휘실력의 진보'라는 점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먼저 상징적이지만, 이번에 그가 지휘한 빈 필하모닉과

빈 징페라인은 100년전 '말러의 악기'였던 바로 그 악단과 합창단이다.

 

녹음장소인 빈 무지크페라인 역시 말러의 체취가 배어 있는 연주공간이다.

"당연히 연주는 더 빈풍으로 세련되어졌다.

2악장의 소박한 춤곡, 미끄러지듯한 포르타멘토,

그 밖의 여러 부분에서 빈의 체취가 더해질 수 있었다.

 

'1류 악단들, 아마추어 지휘자'

처음 듣는 말러의 교향악과 연결된 '감성의 끈'을 그는 느꼈지만,

이제 막 뉴욕 금융계에 발을 디딘 사회 초년생에게는 더 급한 일이 있었다.

 

2년 뒤, 그는 25세의 나이로 금융 전문지 '인스티튜셔널 인베스터'를 창간했다.

시작부터 1만8000부라는 범상치 않은 부수로 출발한 이 잡지는

이윽고 100여개 나라에서 10만부 이상 판매되며

그를 세계 금융계의 대표적 '성공인' 중 하나로 띄워올렸다.

 

그가 금융 이외의 일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부활'을 처음 접하고 18년이 흐른 뒤인 1983년이었다.

객석에 앉아 '부활하리라, 나의 진애(塵埃)여, 무(無)로부터!'를 들으며

전율하던 젊은이는 40대의 중년이 되어 지휘대에 섰다.

 

18년전 객석에 있었을 때와 같은 카네기홀,

같은 아메리칸 심포니 오케스트라였다.

지인들만 초대한 콘서트였지만 뉴욕 데일리 뉴스는 이 사건을

83년의 공연계 10대 이벤트중 하나로 꼽았다.

지금까지 들어본 가장 뛰어난 연주 중 하나였다'는 평이 곁들여졌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2년 전인 1981년,

그는 '독선생'을 들이고 매일 5시간씩 '음악 공부'에 돌입했다.

악보 읽기를 다시 배우고, 지휘법을 배웠다.

그리고 '부활'의 총보를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최소한 이 시작단계에서 악단을 '돈으로 샀다'는 것을 부인할 이유는 없었다.

돈으로 산 연주였지만 그는 충분 이상의 감동을 이끌어냈다.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뿌듯한 만족감을 느꼈고, 다시 지휘대에 선다는 생각은 갖지 않았다."

 

그러나 '지휘봉을 든 잡지사 회장'의

다음 연주를 기다리는 목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휘생활 20년, 그가 지휘한 '부활'공연은 50건을 헤아리고

그가 지휘한 악단의 리스트 역시 30곳을 넘었다.

그 대부분은 세계 초1류 오케스트라로 이름을 들기에 손색이 없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함부르크 북독일 방송교향악단,

라스칼라 관현악단,

오슬로 필하모닉,

스톡홀름 필하모닉,

러시아 국립 오케스트라,

키로프 오케스트라,

상트 페테르부르그 필하모닉,

세인트 루이스 교향악단,

피츠버그 교향악단,

워싱턴 내셔널 교향악단 등이 그의 지휘봉을 거쳤다.

그러나 그의 레퍼토리는 변함없이 단 하나,

데뷔때와 다름없는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이다.

이 '지정곡'으로 1996년에는

잘츠부르크 음악제 개막연주에 초대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39. Langsam, Misterioso-'Aufersteh'n'

아마추어가 아닌, 전문 연구가의 말러 '부활'교향곡 - '말러,

1960년대, 길버트 카플란' 구스타프 말러가

1911년 불과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은 분명 애석한 일이었지만,

이는 어떤 면에서 절묘하기도 했다.

 

1960년과 61년에 세계는 그의 탄생 100주년과 서거 50주년을 연이어 맞이했다.

이 낯선 '작곡가'의 작품은 2년 내내 도처에서 연주됐다.

작곡가로서 말러의 자질을 의심하는 시각은 반세기동안 사라지지 않았었지만,

대 지휘자로서의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세대가 머리 희끗하나마

유럽과 아메리카의 양 대륙에 걸쳐 남아있었다.

그의 추억을 간직한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등 제자들도 아직 살아있었다.

 

두 차례의 대 전쟁을 겪은 세계는 모처럼 맞은 평화속에 풍요를 회복하고 있었으나

한편 '인간의 기계화'에 대한 두려움이 끊임없이 위안과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었다.

무조주의에 점령된 작곡계는 대중들에 어필할만한 산물을 내놓지 못했던 반면,

연주자와 악단들의 기량은 날로 일취월장해져 작곡가들의 상상속에서나 이뤄졌던

높은 수준의 연주가 실제로 가능해졌다.

 

이런 상황속에서 말러는

LP와 FM으로 무장한 새 시대의 음악팬 앞에 훌쩍 돌아왔다.

'축제'는 2년이었다.

그러나 곧 사그라들 것 같았던 불꽃은 꺼지지 않고 더욱 휘황하게 피어올랐다.

이 시기를 되돌아볼 때 말러가 교향곡 2번에 붙인 제목은 사뭇 시사적이었다.

 

'부활(독·Auferstehung·영·Resurrection)'이라는 이름은

1차대전으로 사라져버린 오스트리아 제국 및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대)'와 함께 땅에 묻혔던 대 작곡가를

다시 지상으로 불러내는 키워드이기도 했다.

 

오늘날 5번 이후 말러의 순기악적 교향곡들이 많은 감상자를 찾아가고 있지만,

60년대에 말러 해석과 수용의 중심은 단연 1번 4번,

그리고 '칸타타적'으로 웅대한 2번 교향곡이었다.

 

이 음반을 스스로 구입한 독자는 대부분 길버트 카플란의 '신화'에 대해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카플란 또한 60년대 초 '말러 부활'의 충격파가 남긴 여진에 포로가 된 인물이었다.

 

1965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지휘

아메리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부활'을 들을 때까지

그는 어릴 때 피아노를 배운 스물 세 살의 평범한 음악애호가에 지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말러의 작품은 그때 처음 듣는 것이었다.

당시의 경험을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벼락이 내 몸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Bochum:scholle/06.08.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