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죽음의 춤, Totentanz"
Franz Liszt의 "Totentanz" S126
Marc-Andre Hamelin with the Bremen Philharmonic
항가리 태생의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의 작품
"죽음의 춤, Totentanz", S.126은
리스트가 1838년에 다구부인과 이태리를 여행하던 중에
피사의 묘당에서 본 벽화
"죽음의 승리"에서 영감을 얻어 1849년에 피아노 협주곡으로 작곡하였는데
1853년과 1859년에 수정을 하여 1865년에
Hans von Bülow에 의해 초연된 곡이라고 합니다.
올 해가 "피아노의 파가니니"라고 불리우는
항가리 태생의 음악가,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0.22. 1811 - 7. 31. 1886)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난 10월 22일이 그의 200번째 생일이었네요.
항가리의 라이딩근처 작은 마을에서 농장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현악기와 피아노도 칠 줄 아는 아버지가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서 자란 리스트는
7살 때부터 아버지로 부터
피아노를 배우면서 천재적 재능을 나타냈고
비엔나에서 베토벤의 제자 칼 체르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우며
12살에 데뷰를 하였고 작곡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22살에 파리에 가서 공부를 할 때
헥토로 베를리오즈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으며
파가니니의 공연을 다녀온 후에는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
매일 10시간이 넘도록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Franz Liszt (1847) Portrait by
Miklos Barabas, a Hungarian painter
Marie d'Agoult (1843),
파리에서 멋진 금발과 신비스러운 눈매로
파리의 음악계를 누비던 프란츠 리스트는...
다섯살이나 연상의 미모와 교양을 지니고,
예술가들이 드나드는 살롱을 가지도 있었던 다구 백작부인, Marie d'Agoult (Marie Catherine Sophie de Flavigny: 1805 -1876))와
스위스의 제네바로 사랑의 도피를 하여
결혼은 하지 않고
그곳에서 세 아이를 낳으면서 살다가 (1835-1839)
그 후에 리스트가 유럽 연주여행을 많이 다니게 되자
다구부인은 자녀들과 파리로
돌아가서 살다가
결국 1844년에다구 부인과는 헤어지게 됩니다.
1842년 이 후 리스트는 여전히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유럽에서 컨서트를 하였는데
많은 열렬 팬들, 특히 여성팬들은
자신의 다이아몬드나 귀금속을 무대에 던지기도 하고
리스트의 실크 손수건이나 벨벳 장갑 등을
기념품으로 갖고자 빼앗기도 하는
"Lisztomania"가 유럽을 휩쓸었다고 합니다.
그는 많은 자선 음악회를 하며 베토벤 기념관, 항가리의 국립음악학교,
페스트의 레오폴드 교회 등의 건설에 도움을 주었고
개인적으로 병원,
학교나 많은 기부금을 납부하였다고 합니다.
1847년 2월에 키에브에서 연주할 때
또 다른 여자, 러시아의 대 귀족인
Princess Carolyne zu Sayn-Wittgensteim(자인-비트겐슈타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음악생활에 큰 활력을 불어 넣어주었던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과 결혼하려고 했지만
교황청은 공작이 아직 살아있기에
공작 부인의 이혼을 허락하지않아서
결혼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1859년에는 다구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 Daniel을 잃고,
1860년에 로마에서 비트겐슈타인 부인과 결혼하기로 예정되었었는데 하지 못하고
1862년에는 딸 Blandine 마저 잃게 되자 슬픔에 잠겨있다가
비트겐슈타인 부인과도 결별을 하고
1863년에 로마 교외에 아주 작은 아파트를 얻어 살며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Abbé라는
칭호를 들으며 교회에 헌신하며 지내다가
다시 로마와 위마, 부다페스트 등을 다니며 연주를 계속하였습니다.
1886년 연주여행을 가던 중에 걸린 감기가 폐렴이 되어
바그너와 결혼한 둘째 딸 코지마의 품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이동활의 음악정원]
[Bochum:scholle/01.12.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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