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가장조 KV488
Piano Concerto No.23 in A major, KV488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Vladimir Ashkenazy, piano
cond. - Philharmonia Orchestra
[작품 해설 구성]
모짜르트의 피아노 협주곡들은 그 정묘한 맛과 향취,
피아노와 관현악의 밀고 당기는 듯한 미묘한 경쟁,
관악기와 피아노 독주와의 대화가 주는 절묘함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중 이 협주곡은 그의 전성기 때 쓴 것으로(쾨헬 넘버 400 번대)
이때가 모짜르트의 가장 질 높은 피아노 협주곡들이 탄생하던 시기였다.
D minor의 20번을 시작으로
2악장이 유명한 21번, 멋있는 22번,
그리고 이 곡을 거쳐서 24번으로 마무리되는
그의 전성기 피아노 협주곡들은 하나같이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고 보여진다.
그 중에서도 모짜르트의 장조협주곡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당연히 이 곡을 들어야 한다.
21번에서 시작하여 23번을 거쳐 25, 26, 27로 이어지는
장조 협주곡 군에서..
이 곡은 가히 최고봉에 우뚝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23 번은
모짜르트 특유의 아이러니라고나 할수있는
우는 듯한 웃는 듯한 그 느낌을 가장 잘 나타내 준다.
이런 느낌은 특히 1 악장에 잘 나타나 있는데
현악기가 유도하는 제 1 주제가 그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피아노는 화려하게 움직이고 관현악도
이에 맞추어서 들어갈 시간에 들어가고 나갈 때
나가는 앙상블을 보여준다.
이 곡의 1악장이 주는 아이러니는 형식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멜로디가 주는 느낌이다.
절묘하게 조가 바뀌면서 분위기가 슬며시 변했다가 도로 돌아온다.
슈베르트가 전조로 인한 감정전환에 아주 능한데
모짜르트의 이런 면을 보고 배우지 않았나 싶다.
이 악장을 유심히 듣다 보면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4번에 나타날 서정성의
극치를 미리 보는 것 같고
사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4번이
베토벤의 3번 피아노 협주곡의 모델이 되었고
22번과 25번이 베토벤의 황제의 모델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 곡을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의 모델로 삼게 되는 것에
망설이지 않게 된다.
바이얼린 소나타 K.301의 1악장을 들어본 사람은
그 곡이 주는 1악장의 극단적으로 아름다운 정신의 세계가
이 곡에서 어떻게 더욱 더 정화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2. Adagio - Vladimir Horowitz, Piano
Carlo Maria Giulini, Cond
La Scala Theater Orchestra
2 악장은 전형적인 3박자 형식의 단조.
이걸 잘만 연주하는 사람이 한다면
참 좋은 곡이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
중간의 트리오는 교향곡 40 번처럼 정묘하게 진행된다.
시칠리아노 풍의 리듬에 실린 이 f#단조의 악장은
그 찌르는 듯한 조성에도 불구하고
이 속에 실린 우수는 쇼팽을 능가하며 앞날에 다가올 낭만주의에의,
특히 쇼팽이 추구한 음악에의 예시가 아닐까 한다.
트리오에서 단 2개의 관악기만으로 이렇게 풍요로운
소리를 낼 수 있는 작곡가는 모짜르트 외에는 없다.
Piano Concerto No.23 in A major, K.488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들은
그 정묘한 맛과 향취, 피아노와 관현악의 밀고 당기는 듯한
미묘한 경쟁, 관악기와 피아노 독주와의 대화가 주는
절묘함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중 이 협주곡은 그의 전성기 때 쓴 것으로(쾨헬 넘버 400번대)
이 때가 모차르트의 가장 질 높은 피아노 협주곡들이 탄생하던 시기였다.
피아노 협주곡 제23번은 후기의 작품 중에서도 친근한 주제와 양 끝 악장에 흔히 볼 수 있는
소나타 형식과 론도 형식의 악곡 구조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협주곡이다.
또 관현악과 독주 피아노가 동일한 주제를 연주하는 것도
이 곡의 밀도를 높이고 또한 알기 쉽고 친근미 있는
요인이기도 하다.
초연은 1786년 3월 2일의 예약 연주회로,
모짜르트는 자신의 피아노를 갖고 연주했다고 한다.
풍부한 가락을 균형잡힌 구성 아래 원숙한 수법으로
처리한 명작이며, 독주악기와 관현악의 혼연한 연주가 일품이다.
그리고 베토벤의 4번 피아노 협주곡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제1악장 Allegro - Cadenza - Tempo I A장조 4/4박자
제1주제는 먼저 제1바이올린으로 제시되며
이어 목관에 의해 반복된다.
경과부를 지나 제2주제도 으뜸조에 의해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며 목관과 함께 반복된다.
비교적 짧은 코다에 이어
피아노가 단독으로 제1주제를 연주하고
다시 자유스러운 형태로 반복되며 관현악에 의한 경과부가
다시 나타나고 피아노에 의한 빠른 패시지로 E장조에 옮겨진다.
제2주제도 피아노만으로 제시되며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어울림을 지나 빠른 패시지를 거쳐코다에 이르고
제시부를 마친다.
전개부는 새로운 주제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현악기로 제시된 후,
주제의 전반의 변형되어 목 관에 피아노로 나타난다.
피아노는 빠른 패시지로 옮겨지며
이것을 반주하는 것은 현악기와 관악기에 의한
앞에서 와 같은 변형된 음형으로 이루어진다.
이어서 피아노에 의해 제1주제가 재현되고 있다.
재현부는 제1바이올린과 목관악기로 제1주제가 연주되며
피아노가 장식하면서 이를 반복한다.
형식대로 경과부를 지나 제2주제는 으뜸조로
처음에는 피아노, 다음에는 목관악기로 재현된다.
전개부에 나타난 주제도 피아노에 의해서 재현되고
피아노의 패시지를 이 음형으로 목관악기가 반주하고,
다시 이 주제는 관현악에 나타나서 카덴짜가 된다.
제 2악장
Adagio 올림F단조 6/8박자
시칠리아의 리듬에 의한 조용한 주제가
피아노만으로 개시되며 제2바이올린의 반주로
목관악기와 제1바이올린이 이 주제에 답하듯
아름다운 음형을 한 마디 늦게 연주해 간다.
이어 피아노가 주제를 변형해서 연주하며 A장조로 이어진다.
중간부에서는 플룻과 클라리넷이 새로운 선율을 연주하면
피아노가 이를 반복한다.
여기에 이어 목관과 피아노의 어울림이 계속되고
다시 처음의 주제가 피아노에 나타나며...
중간부의 주제도 보이면서 피치카토의 반주로 피아노가
천천히 도약 음정을 연주하다가
피아니시모로 조용히 끝을 맺는다.
이 2악장은 아름답고 슬픈 선율로 영화음악이나 CF 등에 많이 사용되었다.
제 3악장 Allegro assai (A장조 2/2박자)
론도 주제가 4번 나타나는 동안 매력적인 부주제가 몇개 쓰이고 있는 것이 이 악장의 가장 큰 특징이다.
먼저 피아노에 의한 경쾌한 주제로 개시되는데,
이것은, 제1바이올린으로 반복되어 관현악만의 경과부로 들어간다.
이어서 부주제가 피아노에 나타나서
클라리넷이 전반을 반복, 피아노의 패시지로 E장조로 바뀐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부주제가
c단조로 목관과 제1바이올린으로나타나며 피아노가 이를 반복한다.
피아노에 의한 경과구에 옮겨지고
최후에는 코다풍의 선율이 다시 피아노로 나타나 목관으로 반복된다.
드디어 론도의 주제가 재현되고
제 1바이올린으로 반복, 그대로 전개되어 올린C장조로 종지한다.
올림 f단조가 된 다음에는 피아노의 패시지가 계속되며
목관과 더불어 반복되고,
다시 피아노의 분산 화음을 타고 클라리넷이
D장조의 새로운 주제를 연주하고 피아노가 이를 반복한다.
이어서 전반에 나왔던 부주제들을 재현한 후,
피아노의 경과부에 이어 코다풍의 주제가 나타난다.
이어서 론도 주제가 피아노로 재현, 현악기로 반복.
경과부를 지나 피아노에서 목관으로 이어지며 화려하고 힘차게 곡을 맺는다.
Vladimir Ashkenazy(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피아니스트, 지휘자 (1937 ∼ )
출생지 : 러시아 고르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Vladimir Ashkenazy)는
1937년 7월6일 모스크바 서쪽 고르키라는 도시에서
유태인 피아니스트의 아버지 슬하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의 전문 실내악 피아니스트,
즉 앙상블 피아니스트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6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아쉬케나지는...
7세 때에는 학생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하이든의 협주곡을 연주할 정도로 천부적인
음악적 기질을 발휘하였다.
초창기 그의 피아노 레퍼토리는 전통적인 곡에 국한되어 있었으나
후에 프랑스 작곡가, 특히 러시아 작곡가들의 곡도 섭렵하게 된다.
그의 아버지가 밝고 가벼운 곡만을 연주하는
즐기기 위한 음악을 만드는 피아니스트였던 것에 반해...
아쉬케나지는 무엇을 연주하든 훌륭한 연주를 들려준다는
찬사를 받을 만큼 다양하고 폭 넓은 레퍼토리를 소화해내었는데,
베토벤과 라흐마니노프 만큼 서로 다른 두 작곡가의 곡을
그토록 완벽하게 마스터한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는 찾을수 없다는 평을 얻고 있다.
1940년 아쉬케나지와 그의 가족은
고르키에서 모스크바로 이사하는데 모스크바에서의 생활은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으나
그를 위한 음악 교육적 환경만은 매우 뛰어난 곳이었다.
그의 본격적인 음악가로서의 성장은
9세 때부터 출발하는데 그가 모스크바 음악원 부속의
중앙음악학교(Central School of Music)에 입학하면서 부터이다.
1955년 18세 때 음악학교를 졸업한 아쉬케나지는
같은 해 바르샤바 쇼팽 국제 콩쿠르
(Warsaw Chopin Competition)에 나가 2위에 입상하였으며
모스크바 음악원(Moscow Conservatoire)에 입학하여
레프 오보린(Lev Oborin)의 피아노 수업에 참여하며
더욱 심도있는 음악교육을 받게 된다.
1956년 아쉬케나지는 처음으로 서방세계로
연주여행을 떠나게 되고 벨기에 브뤼셀의 라이네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Reine Elisabeth Competition)에서
1위로 우승하였으며 이로 인한 연주회에서
경이로운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가 연주한 베토벤 후기 소나타에 열광한 언론은
아쉬케나지가 아니라 베토벤 자신에 의해 직접 연주된 것과 같은
사운드였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또한 그는 위대한 연주자로서의 3가지 덕목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음악적 재능, 지적인 이해력, 완벽한 테크닉이다.
아쉬케나지는 1963년 모스크바 음악시절 만난
아이슬란드의 피아니스트
토룬 요한스도티어(Thorunn Johannsdottir)와 결혼한다.
이들 부부는 아들을 하나 낳은 후 영국으로 건너가
네 명의 아이들을 더 낳았고
그 중 두 명은 각기 피아노와 클라리넷 연주자가 되었다.
1968년부터 아이슬란드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해 온 그는
보다 자유로운 음악 활동을 위해
1974년 소련국적을 버리고 아이슬란드 국민이 된다.
1970년부터 그에게는
중요한 제2의 음악인생이 시작되는데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뿐 아니라 지휘자로서의
음악활동에 전념하게 된 것이다.
방대한 녹음작업과 전세계로의 연주여행을 통해
점차 그의 음악성을 서방에 알리게 된 아쉬케나지는
자신이 피아노 연주자 뿐 만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 새로운 음악세계에 빠져들고 싶어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드디어 그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제 1 객원 지휘자),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음악 감독),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제 1 객원 지휘자),
베를린 독일 심포니 오케스트라(chief conductor 및 음악감독) 등에서
세계 최정상의 지휘자로서 활동하게 된다.
지휘자로서 활동하는 가운데에도 피아니스트로서의
연주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던 아쉬케나지는
라흐마니노프 전집을 레코딩하는 등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였는데 이제 그는 소문이 아닌
자신의 순수한 음악적 품위로 전세계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는
음악가로 평가받고 있다.
1998년 1월, 아쉬케나지는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Czech Philharmonic Orchestra)의 chief conductor의 자리에
임용되어 오늘날까지 다양한 순회공연과
레코딩으로 할발한 음악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1999/2000 시즌에는
유럽, 일본, 북미와 남미 순회공연을 가진 바 있으며
2000/2001 시즌에는 런던, 비엔나, 루체른, 독일,
그리스 등 유럽 및 한국과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할 계획이다.
그는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활동 외에
European Union Youth Orchestra의 음악감독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계관지휘자로도 일하고 있다.
아쉬케나지는 지휘자로서의 활동 외에도
유럽, 극동, 미국에서 피아노 독주회와 레코딩작업으로
자신의 끊일 줄 모르는 음악적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이 시대의 위대한 음악가임에 틀림없다.
지휘자"로서의 아쉬케나지
1975년경 본격적인 지휘활동을 시작한 아쉬케나지는
1977년 영국에서 정식으로 지휘자로 데뷔하는데
당시 그의 나이 40세가 되던 해였다.
그의 지휘자로서의 주요 경력을 살펴보면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
로얄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음악감독,
클리블랜드 관현악단의 수석 객원지휘자,
베를린 도이치 오케스트라 지휘자,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
그 밖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및 보스톤 심포니,
그리고 런던 심포니 등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경력이 있다.
그의 지휘자로서의 음악적 기질에 대해 언론에서
'아쉬케나지가 최근 지휘를 시작한 것도 그의 음악적 요구가
이제 피아노의 표현력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는
필연적인 요인이 있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에게는 지휘자로서도 성공할 만한
반사신경의 날카로움이나 음색에 대한 감각,
단원을 자신이 나아가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음악적인 설득력이
갖추어져 있다'라고 호평을 할 정도로
지휘자로서의 아쉬케나지는 그 출발부터 그의 천부적인
기질을 인정받았다.
피아니스트에서 지휘자로의 변신에 대해
아쉬케나지 자신은 '나는 항상 오케스트라는 신비하다고 생각..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는 악기를 연주하는데 대한
분별력 있는 태도가 개발되었다.
어떤 점에서 나는 별로 들어보지 못한 것을 즐기기 시작했고
또한 나는 그런 것들이 다소 다르게 연주되어 들린다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오케스트라 앞의 지휘대에 서려고 하는 억제된
욕망 때문이 아니라 내가 듣고 싶은 방식으로 어떤 음악을
연주하게끔 할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지휘에 있어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닌
그 이상의 것임을 일찌기 알고 있었던 아쉬케나지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면,
당신의 정신과 마음이 어떤 것을 갖고 있다면 훌륭한 테크닉 없이도
음악을 만들 수 있다'라고 믿었으며..
실제로 그는 청중을 감동시키고 음악에 영감을 불러 넣어주는
타고난 능력에다 날카롭고 분석적인 두뇌를 가진
깊이있고 조심스러운 음악가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리하여 영국 비평가들은 그를 "음악 사상가"라고 말할 정도이다.
아쉬케나지가 지휘함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시 여기는 것은...
지휘자가 그 음악의 작곡자와 어떻게 의사소통할 것이냐인데
그는 아마도 이러한 선천적 재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뒤늦게 시작한 지휘자의 길을 감에 있어서도
그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자신만의 해석과 감성으로
독창적인 지휘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는 악보를 연구하는 데서가 아닌 바로 지휘를 함으로서
그러한 음악적 해석이 가능해진다라고 말하고 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아쉬케나지
피아니스트인 아버지의 음악교육에 따라
6세때부터 피아노 수업을 시작하여 온 아쉬케나지는
1955년 18세 때 국제 쇼팽 콩쿠르에서 2위로 입상하면서부터
그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인 1956년부터 시작된 서방으로의 연주여행은
그를 언제나 신선한 이미지를 주는 피아니스트이며,
항상 청중이 크게 기대하는 연주가라는 평을 받게 하였다.
연주를 함에 있어 그의 지향적인 규범은
자신의 감정을 살리는 동시에 선천적인 날카로운 평형감각을
음악적 조형에 적용하는 데에 있다.
그의 연주법은 소련의 명교수들이 창조한 합리적인 방법을
자신에 맞게 완전히 소화해내었다고 볼수있다.
유난히 작은 체구의 아쉬케나지는
자신의 큰 손으로 전신을 강한 스프링과 같이 움직이며
손끝에 전신의 중량을 얹은 듯 정확한 기술과
감성으로 작품을 연주해낸다.
자신의 연주기법에 대한 아쉬케나지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허식을 제거하는 것이다.
베토벤이나 모짜르트의 핵심을 잡고
거기에 숨겨져 있는 고유의 간결성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그의 연주에 감명을 받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보내는 찬사는...
그의 연주가 매우 유연하며 천부적 예술가의 기질로
생명이 약동하는 신선한 표현력을 갖고 있다는 것인데
그의 연주는 바흐로부터 프로코피에프에 이르는
다양한 레퍼토리로 최근의 연주는 인간적 성숙까지도
반영하는 깊은 정서적 표현을 가능케 해내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아쉬케나지는 자유로운 음악활동을 위해
고국인 러시아를 떠났고 아픈 희생을 치른 만큼
독자적 연주양식을 확립해내었다.
실제로 그는 지적인 구성력을 더욱 강화하는 것과 병행하여
감정을 더욱 대담하게 표현해 왔는데,
그러면서도 음악적 순수성에서 멀어지는 적이 없었다고 한다.
예술가가 만족했을 때 그 예술적 생명은
끝이 난다고 믿고 있는 그는 요즈음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
성실성을 보이며 누구보다도 예술가로서의 여정을
지속시켜 나가리라 결심한다.
[출처:음악과 사랑이 흐르는 강]
[Bochum:scholle/22.06.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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