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onio Vivaldi (1678∼1741)

비발디 첼로와 바소콘티누오를 위한 소나타 6번

scholle 2014. 1. 4. 06:48

비발디 첼로와 바소콘티누오를 위한 소나타 6번

Sonata for Violincello and Basso Continuo No. 6 in B Flat Major RV 46

Antonio Vivaldi (1678∼1741)

 

 

 

2악장 Allemande

협주곡에 많은 작품을 남긴 비발디였지만,

실내악 작품에는 그다지 손을 대지 않았는데

유독 첼로 소나타 만큼은 9곡이나 작곡을 했다.

 

첼로소나타는 9곡 모두가 교회소나타 양식인

느림-빠름-느림-빠름의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협주곡들에 비해 간결한 구성으로 작곡되어있다.

 

Pieter Wispelwey & Floriegium Pieter Wispelwey, violoncello (Barak Norman 1710)

Neal Peres Da Costa, harpsichord,

organ Daniel Yeadon, continuo violoncello Elizabeth Kenny,

archlute, theorbo, guitar William Carter, archlute, theorbo, guitar

 

1악장 Preludio

2악장 Allemande

3악장 Largo

4악장 Corrente [바로크 소나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전반에 걸친 초기 바로크시대에는

아직 소나타의 정형화(定型化)를 볼 수 없고,

다양한 형식의 악곡에 이 명칭이 쓰였다.

 

일반적으로 기악 칸초나의 영향이 짙고,

몇 개의 대조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1악장형식을 취한 것이 많다.

 

특히 G.가브리엘리를 중심으로 한 다성부(多聲部)의 합주소나타,

S.로시와 B.마리니를 중심으로 한 독주 또는 실내악소나타가 중요하다.

그 후에도 오페라나 칸타타의 서곡이 소나타로 불린 예도 있다.

 

17세기 후반의 중기 바로크에 이르자,

소나타는 거의 앞서 말한 정의에 합치되는 기악곡이 되고,

교회소나타(소나타 다 키에사:sonata da chiesa)와

궁정(실내)소나타(소나타 다 카메라:sonata da camera)의 2종류로 정형화하였다.

 

교회소나타는 일반적으로 ‘느림―빠름―느림―빠름’의 4악장형식으로

비교적 장중한 표현을 특징으로 한다.

제1악장은 짝수박자로 특히 장중하고,

제2악장은 푸가,

제3악장은 홀수박자의 화성적 서법(書法),

제4악장은 춤곡풍의 리듬을 지닌 것이 많다.

 

궁정(실내)소나타는 몇개의 대조적인 춤곡을 배열한

일종의 모음곡으로, 알망드 ·쿠랑트 ·사라반드 ·지그 가보트 등이 즐겨 쓰였다.

이 두 형태의 소나타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발달하여,

많은 작곡가가 뛰어난 작품을 남겼는데,

중기 바로크의 소나타를 형식 ·

내용과 함께 완성의 영역에 이르게 한 것은 코렐리였다.

 

악기 편성상으로 보면 바로크의 소나타는

솔로(독주)소나타와 트리오(3성부)소나타로 대별된다.

통주저음(通奏低音) 위에 전자는 1개의 성부를,

후자는 2개의 성부를 가지며, 선율악기는 거의가 바이올린이고,

드물게 트럼펫이나 플루트 등이 쓰였다.

 

후기 바로크에 들어서자,

교회소나타와 궁정(실내)소나타의 구별이 점차로 해소되고,

두 형태를 혼합한 3∼4악장의 것이 많아졌다.

17세기 중엽부터 소나타는 다른 여러 나라에도 퍼져,

이탈리아의 알비노니, 비발디, 마르첼로, 타르티니, 제미니아니 등 뿐만 아니라,

독일의 비버, 무파트, 푹스, 텔레만, 헨델, 바흐, 영국의 퍼셀,

프랑스의 쿠프랭, 르클레르 등도 이를 작곡, 더욱 발전했다.

 

특히 바흐는 1개의 선율악기나 쳄발로의 소나타를 작곡해서

고전파의 이중소나타를 준비하고,

무반주 소나타로 단일 악기에 의한 표현의 가능성을 추구하였다.

비발디, 안토니오 Antonio Vivaldi(1678 ~ 1741 / 이탈리아)

 

안토니오 '비발디'는 1678년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1741년 빈에서 세상을 떠난 이탈리아의 위대한 작곡가인 동시에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가 였으며, 또한 교육가이기도 하였다.

 

1703년 카톨릭 성당의 사제로 출발하였으나

건강이 나빠져 1년 후에 물러나 그 후로는 전적으로 음악에 헌신하였다.

'비발디'는 붉은 머리였기 때문에 항상 '빨강머리의 사제'라고 불리었었다.

 

그리고 1703 ~ 1740년까지 베니스의 여자 고아원인

피에타 음악학교의 지휘자 겸 작곡가, 교사, 음악 감독을 역임했었다.

그는 이 학교를 위하여 모테트와 칸타타, 오라토리오 등을 작곡하였다.

 

특히 '비발디'가 결정한 3악장 (알레그로-아다지오- 알레그로)에 의한

협주곡 형식은

J.S.Bach에게 영향을 주어 바로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협주곡 형식이 되었다.

비발디는 미사 절례를 앞두고도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다고 한다.

 

사방을 찾아 다니노라면

수도원 으슥한 구석에서 바이올린이나 켜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했다니,

결코 모범적인 사제는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작곡가겸 바이올리스트로서의 그의 명성은 이미 전 유럽에 퍼져 있었다.

 

25세 때는 피에타 여자 음악원의 바이올린 교사로 임명되었다.

여성으로만 구성된 그 곳의 오케스트라는 상당히 수준이 높아

그녀들을 위해 많은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똑같은 곡을 1백곡이나 써 갈긴 사람이다.' 이것이 험담가로도 유명한

후세의 스트라빈스키가 비발디를 가르켜 비꼬아 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비발디는 교회용, 행사용 등등으로 몇개 악장으로 된

꽤 긴곡을 평균 2,3일에 한곡씩은 써야 할 처지였다.

 

사보가들이 미처 따라오지 못할 만큼 초고속으로 작곡을 해댄 결과

그는 협주곡만 해도 450곡이나 남겼으니 그게 그거라고 할 정도로

서로가 엇비슷해질 수밖에...

45세 무렵 비발디는 안나 지로라는 여가수를 알게 되어

순회공연까지 함께 다녔다.

당연히 사제로서 미사를 빼먹는 일은 더욱 잦아졌고,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이 고울리 없었다.

베네치아에서의 그의 평판은 갈수록 땅으로 떨어졌다.

 

결국 그는 고향을 떠나 유럽 각지를 전전해야 했다.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극도의 빈곤 속에서 객사한 것은 그의 나이 63세 때였다.

피붙이라고는 없었던 그를..

기다리는 곳이라고는 빈 변두리의 쓸쓸한 빈민묘지 뿐이었다.

비발디의 음악은 한때는 잊혀져가는 듯했지만

2차 대전 이후로 다시 소생해 세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이탈리아 실내악단에서는 그의 각종 악곡들을 빼놓을 수 없는

스탠더드 레퍼토리로 삼고 있다고 하며,

비발디'의 협주곡 중에서

제5번 A장조 '바다의 폭풍우'

제6번 a단조 '즐거움',

제7번 D장조,

제18번 g단조,

그리고 '사계는 너무나 잘 알려진 곡이다.

이 사계는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의 선조가 된 곡으로 알려져 있다.

 

[Bochum:scholle/04.01.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