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slivecek Josef-Violin Concerto in C Major
Libor Pesek(Cond) Dvorak Chamber Orchestra
Josef Mysliveček (1737~1781)체코
Shizuka Ishikawa (violin)
요제프 미슬리베체크-바이올린 협주곡 in C Major
리보르 페세크(지휘)드보르작 실내악단
1.Allegro con spirito 6:51
2.Largo 2:50
3.Allegro 5:13
모차르트보다 19년 먼저 태어난 체코 출신의 작곡가로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와 모차르트 등과 가깝게 지냈고,
실제로 모차르트의 초기작품은 미슬리베체크의 작품을 직접 가져다
쓰거나 편곡 하는 등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18세기에 활동하면서 고전주의 양식 확립에 크게 기여한
거의 유일한 체코 출신의 작곡가로서 특히 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 세리아(정가극) 등에서
모차르트의 사표가 되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모차르트가 14살 때였던 1770년에 볼로냐(Bologna)에서 처음 만난 이후
오랜 세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다가
나폴리 ‘싼 카를로 극장’에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상연시켜 주겠다는 미슬리베체크의 약속이 어긋나면서
둘 사이의 관계가 단절되기는 했지만,
모차르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음악적 성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미슬리베체크는 프라하의 부유한 제분업자의 쌍둥이로 태어났다.
당시의 전통에 따라서 미슬리베체크도
아버지의 가업을 이을 생각으로 찰스 페르디난트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제분의 마이스터 자격도 얻었지만
어느날 갑자기 가업계승을 포기하고 음악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고향에서 선생을 찾아다니며 공부하다가
1763년에 베네치아로 가서 죠반니 페스체티(Giovanni Pescetti)에게
본격적으로 작곡법 등을 배웠다.
그가 이탈리아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부잣집 아들인데다
체코의 귀족 빈센츠 폰 발트슈타인(Vincenz von Waldstein)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면서 그에겐
‘일 보에모(보헤미안)’
‘베나토리니(Venatorini)’ 작은 사냥꾼’ 등의 별명이 붙여졌다.
그의 체코 이름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1771년, 미슬리베체크는 ‘볼로냐 아카데미아 필하모니카의 멤버가 되었다.
당시의 음악가들은
대부분 귀족, 고위성직자, 왕실 등에 고용되어서 활동했지만...
미슬리베체크는 단 한번도 어디에 고용되지 않았던 완전한 자유신분이었다.
그는 오로지 가르치고, 연주하고, 작곡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부자 아버지를 둔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가난과 병으로 가득찬 불행으로
많은 고초를 겪다가 1781년에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생존시엔 1776년 12월에 프라하로 가서 약 1년 4개월 살았던 것과
빈과 뮌헨을 잠시 방문했던 것을 제외하면 이탈리아를 떠난적이 없었다.
미슬리베체크의 첫 오페라 ‘ 세미라미데’가
1788년에 베르가모에서 상연되었고,
또 다른 오페라 ‘일 벨레로폰테(Il Bellerofonte)’는 1767년 1월에
나폴리 싼 카를로 극장에서 상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덕분에 이 오페라는 이탈리 아의 여러 오페라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또 다른 오페라 ‘아르미다(Armida)'는 1780년 스칼라에서 상연되었고,
이 작품의 성공으로 가장 인기 있는 오페라 작곡가로 떠올랐다.
미슬리베체크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여성들과의 사랑에 관련된 자료도 별로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단지, ‘글로브 음악사전’ 제5 편집본에
오페라 가수 가브리엘리(Caterina Gabrielli)와
아구이아리(Lucrezia Aguiari)와 관련된 자료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해지는 단편적인 자료들을 취합 해 보면
여성편력이 다소 복잡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직접적인 원인이 매독이라는 사실과
매독으로 인해 안면 성형수술을 받았다는 기록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모차르트와의 관계]
1770년, 모차르트가 14살 때 볼로냐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슬리베체크를
‘열정과 영감으로 가득찬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표사한 것을 보면
모차르트는 인간적으로도 미슬리베체크를 존경한 것으로 여겨진다.
음악적으로는 미슬리베체크의 오페라,
교향곡, 건반악기를 위한 소나타, 협주곡 등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미슬리베체크가 쓴 아리아
‘Il caro mio bene(친애하는 내 사랑)’ (오페라 ‘아르미다’ 중)를
모차르트가 편곡했고, ‘사랑스런 웃음(Ridente la calma)’은 가사를 바꿔서
자신의 소프라노와 피아노를 위한 작품(KV 152)으로 편곡하는 등
다양한 편곡작업을 통해서 그의 음악 스타일을 모방했다.
1777년 10월 11일에 모차르트가 쓴 편지에 따르면
미슬리베체크가 ‘이상한 병’ 때문에 망가진 코를 수술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 편지에 앞서 레오폴트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엔
“사회적으로 매장될만한 부끄러운 병”이라고 쓰면서
미슬리베체크의 무질서한 성생활을 언급한 대목이 있다.
레오폴트는 미슬리베체크의 병을 ‘골수암’이라고 추정한 것 같다.
그러나 매독에 걸리면 뼈에 독특한 상처와 함께 변형이 일어난다는
매독의 일반적인 증상을 대입하면 그의 사인이 매독이라는 것이다.
모차르트 일가와 미슬리베체크의 돈독한 관계가 파경에 이른 것은
오페라 상연을 둘러싼 미슬리베체크의 실수가
원이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미슬리베체크의 작품세계]
‘체코 오페라의 아버지’로 불려지는 인물답게
미슬리베체크는 26곡의 오페라를 썼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초연에 성공했다.
그가 오페라에 집중했던 시기는 1766년부터 1780년 사이인데,
이 시기에 이탈리아 스타일의 정가극 작곡가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고,
아울러 오페라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측면에서 미슬리베체크는 글루크와 더불어
오페라 역사에서 매우 비중있는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목관 앙상블 작품에서는 선구자적 작곡가로 인식되고 있다.
3곡의 목관8중주곡이 이를 증명한다.
바이올린 협주곡은 비발디와 모차르트의 그것과 비견될 만큼
아름다워서 자주 연주되고 있다.
교향곡에서는 18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로 평가되고 있고,
그가 쓴 미뉴에토 악장이 없는 3악장 형식의 교향곡들은
오페라 서곡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창의적인 멜로디, 논리적인 형식미, 풍부한 감성으로
듣는 이를 감동시키는 그의 교향곡에서 이 작곡가의 뚜렷한 개성을 만날 수 있다.
[음원출처:고전음악 인기공]
[Bochum:scholle/20.03.2016]
'Josef Mysliveček (1737~178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제프 미슬리베체크-바이올린 협주곡 E장조 (0) | 2016.03.20 |
---|---|
요제프 미슬리베체크-바이올린 협주곡 F장조 (0) | 2016.03.20 |
요제프 미슬리베체크-바이올린 협주곡 A장조 (0) | 2016.03.17 |
요제프 미슬리베체크-바이올린 협주곡 B 내림장조 (0) | 2016.03.16 |
요제프 미슬리베체크-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0) | 2016.0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