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calise Op.34, No.14
라흐마니노프/보칼리제
Sergei Vasili'evich Rakhmaninov (1873∼1943 )
Lev Oborin, Piano /David Oiatrakh, Violin 라
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는 1912년에 작곡된
13개의 가곡 작품 34에 덧붙여진 곡으로, 1915년에 작곡되었다.
이 곡은..
소프라노 가수였던 안토니나 네츠다 노바에게 헌정되었다.
초연은 1916년 모스코바에서 쿠셰비츠키의 지휘로 이루어졌고,
노래는 안토니나 네츠다노바가 불렀다.
이 곡은 첼로와 바이올린의 다양한 배합으로 반주된다.
그러나 이 반주 부분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작곡가 자신이 작곡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보칼리제(vocalise)는..
가사없이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모음으로만 부르는 가창 연습곡이나
연주용 작품을 일컫는다.
포레, 라벨 레스피기, 본 윌리엄스 등의 보칼리즈가 있지만,
가장 대중적 인기가 높은것은 역시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이다.
지금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첼로곡의 하나인
"보칼리제(Vocalise)는 러시아 작곡가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입니다.
우리가 흔히 보칼리제로 부르는 이곡은..
그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전집의 34~14번으로
"사랑의 슬픔"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곡이다.
그의 곡중 세계적으로 가장 알려진 것은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그 자신이 당시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였던 까닭에
그의 피아노 협주곡에 대한 애정은 거의 모든 작품에 드려나 있다.
이곡 보칼리제 역시 첼로를 하나의 맥으로 이어가는 피아노를 통해
대사를 전달하고 있는듯하다.
러시아 낭만파의 거장이기도 한 Rakhmaninov는
미국과 고국 러시아 양국에서 고르게 활동한 음악가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미국에 망명하기전 까지
그는 당시 러시아가 가장 자랑하는 피아니스트 겸작곡가로 활동하였다.
미국에 망명한 이후로는 다양한 작곡과 연주회를 가졌고
지금 전하는 대부분의 그의 작품은 이때 출판 되어진 것이다.
그의 말년에 대한 설은 다양 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시 그가(구)소련을 위하여 보여준 모금 활동을 보면
그가 고향으로 귀환을 간절히 원한것 또한 사실로 보인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David Oiatrakh, 1908~1974, 러시아)
1908년에 오데사에서 태어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는
1974년 10월 24일 암스테르담에서 심장마비로 급서하기 전까지
바이올린의 황제로 불린 러시아 바이올린의 대명사였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음악계의 중심지였던 오데사에서 태어나
나탄 밀슈타인과 함께 표트르 스톨랴르스키를 사사했다.
1926년 오데사 음악원을 졸업한 오이스트라흐는 소련 국내에서 개최된
각종 콩쿨에서 잇따라 우승을 차지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1935년 바르샤바에서 열린 비에냐프스키 콩쿠르에서..
프랑스의 여류 바이올리니스트인 지네트 늬뵈에 이어 2위를 차지했던 다비드는...
1937년 브뤼셀에서 열린 이자이 콩쿨(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전신)에서 우승,
전 유럽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이 당시에
이미 자질을 알아보고 오이스트라흐를 칭찬해 마지 않았다.
그 뒤 유럽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1939년에 미국에서 연주회를 가질 예정이었던 것이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중지되어 오이스트라흐의 활약은 전쟁 후로 연기가 되고 말았다.
오랫동안 철의 장막 속에서 갇혀 있던 그의 유럽 출현은
정말 센세이셔널한 것이었다.
오이스트라흐의 소리는 아름다우면서 폭과 양감,
두께, 깊이를 동시에 갖고 있는 몇 안되는 연주자이다.
또 그의 표현력은..
천변만화의 뉘앙스라고 해야할 정도로 풍부하다.
그래서 그의 바이올린에서는 감미롭고 로맨틱한 표정의 음악이
따뜻하게 흘러나온다.
오이스트라흐는 바이올리니스트 외에도 소련 시절 비올리스트,
지휘자로도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탁월한 독주자였던 동시에, 오보린, 크누쉐비츠키와 함께
위대한 트리오를 이루었다.
인생의 후반기에는 지휘자로서의 활동에도 정력을 쏟았다.
그는 어린 시절에, 오데사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탁월한 지휘 연습을 하는등,
지휘에 대한 욕구가 남달랐다. 하지만,..
독주자로서의 바쁜 활동은 그에게 지휘자로서 활동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1960년 이후로 건강상의 문제 때문에 독주자로서의 활동에
제한이 생기자 그는 본격적으로 지휘 활동에 나섰다
.
이후,
인생의 후반기에는 지휘가 그의 활동의 3분의1가량을 차지했고,
독주자와 교사로서의 활동이 나머지 3분의2를 차지했다.
그는..
베를린 필, 런던 심포니, 암스텔담 콘서트헤보, 레닌그라드 필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는 정열 발산형의 지휘자는 아니었으나,
늘 적당한 템포를 택했고, 앙상블을 정리하는 능력이 돋보였으며,
무엇보다도 단원들의 공감을 충분히 이끌어 냈다고 한다.
지휘자 로제스트벤스키는 그의 지휘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오늘 브람스를 지휘한,
모스크바에서의 그의 마지막 콘서트 레코딩을 듣고,
그가 오케스트라로부터 이끌어내는 표현력과 거장들만이 지닐수 있는
경제적인 제스춰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남아 있는 레코드를 살펴 보면,
그의 레파토리는 헨델, 코렐리 등의 바로크에서 부터..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등의 고전, 낭만파와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 등의 20세기 곡까지 스펙트럼이 넓었다.
그는 1974년 10월에 암스텔담에서 객사했다.
당시 그는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와 브람스 교향곡 전곡을 녹음하던 중이었으며,
그 해 12월에는 에딘버러 오페라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를 지휘할 계획이었다.
결국,
그는 어린 시절 오데사 오페라를 보면서 키워왔던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했다.
아들인 이고르 오이스트라흐도 아버지처럼 바이올린, 비올라 주자로서 활동을 했는데..
그 역시 일급의 바이올리니스트 여서 '킹 다비드와 프린스 이고르'라는
애칭을 받으면서 런던 로열 알버트 홀에서 1950년대에 열렸던
에후디 메뉴인이 지휘하는 모스크바 필과 아들 이고르의 바이올린,
아버지 다비드의 비올라 연주로 듣는 모차르트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음반도 감동의 명반으로 남아있다.
레프 오보린 (Lev Oborin 1907~1974)오이스트라흐와
가장 궁합이 잘 맞는 피아니스트로 숱한 명반을 남겼던..
러시아의 명 피아니스트 레프 오보린은 공교롭게도 오이스트라흐가 타계한 해인
1974년 그보다 몇달 앞서 세상을 떠났다.
1907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오보린은 1921년 그네신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데뷔 연주회를 가졌다.
모스크바 음악원을 졸업한 이듬해인 1927년, 제1회 바르샤바
국제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세계무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균형 잡힌 기교와 쉽고도 명확한 연주를 보여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물 흐르듯 아름다운 레가토는..
특별한 것이었다.
1964년 소련 공훈 예술가의 영예를 안은 오보린은
많은 피아노곡을 작곡하기도 했던 작곡가였으며 다양한 저술을 남긴
평론가이기도 했다.
또한,그의 제자로는, 명 피아니스트 겸 명 지휘자인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러시아,1937 ~ )등이 있다.
그는 모차르트에서 쇼스타코비치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선보였으며
하차투리안의 협주곡을 초연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뛰어난 앙상블 연주자로 특히 오이스트라흐와의 연주는 가장 이상적인
이중주를 만들었다.
[Bochum scholle1/22.12.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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