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n Sibelius (1865~1957 )

시벨리우스 / 바이올린 협주곡 /Violin Concerto in D minor, Op.47

scholle 2010. 2. 14. 05:39
Apocalypse Lossiemouth Violin Concerto in D minor, Op.47 시벨리우스 / 바이올린 협주곡 /Jean Sibelius (1865∼1957) 핀란드 자연이 낳은 음울한 선율. 핀란드의 자연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이 작품의 특성은 독특한 환상적 선율과 풍성한 관현악의 울림에 있을것이다. 시벨리우스의 음악은 핀란드의 자연에서 탄생한 것이고 그만큼 민족주의 색채가 강하다. 전곡 연속듣기 제 1악장 Allegro moderato 2분의 2박자 D단조 자유스러운 소나타 형식. 독주의 바이올린은 북 유럽적이며 애수에 찬 제 1테마가 연주된다. 그리고 제 2테마는 파곳의 연주로 나타난다. 코다에서는 D단조로 전진하다가 끝나게 된다. 1악장 (Allegro moderato) 제 2악장 Adagio di molto 4분의 4박자 B플렛 장조 세도막 형식. 2악장 (Adagio di molto) 제 3악장 Allegro ma non troppo D장조 4분의 3박자. 이 악장은 교향곡에서만 맛볼수있는 론도 형식의 폴로네이즈풍의 곡이다. 독주 바이올린으로 나타나는 제 1테마와 현악기의 유니즌으로 연주되는 제 2테마가 나타나 재현부를 지나고 코다로 들어간 후 끝난다. 3악장 (Allegro ma non troppo) 작품 배경 및 구성 애국적 교향시"핀란디아"로 잘 알려진 잔 시벨리우스의 주요업적은... 7개의 교향곡과 5개의 교향시로 집약된다. 근대 낭만파음악의 아버지"란 칭호를 듣는 그이지만... 개인적 감성을 아기자기하게 묘사한 소품과는 거리가 멀다. 협주곡도 알려진 것은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한 곡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20세기의 훌륭한 바이올린 협주곡들인 바르토크, 스트라빈스키 등의 작품보다 훨씬 인기가있다. 그 이유는시벨리우스가 남긴 단 하나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면 우리들은 흔히 문학 작품을 읽을 때 빠져드는 고요와 같은 감상에 젖어드는 것을 느낄수있다. 즉 이 협주곡은 그 격정적이며 까다롭고 어려운 특성을 뚜렷하게 밖으로 드러내지 않은 가운데 북유럽의 순수한 서정을 담은 아름다운 선율에 감싸여 있는것이다. 물론 1904년 2월 8일 헬싱키에서 초연되었던 이 협주곡 처음의 악보는 다소 실패작이라고 할수있다. 그리고 스스로의 작품 평가에 무척 엄격하였던 시벨리우스도 이 곡에 대해서는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였으며 다시 수정을 하여 개정된 작품을 1905년에 새로이 선보였다. 그런데 1903년 처음 작곡된 것과 1905년에 개정한 것은 모두 버머스터(Willy Burmester)를 위하여 작곡된 작품이었다. 그렇지만 시벨리우스는 이 바이올린 협주곡이 두번이나 무시되는 것에 몹시 불쾌해 있었으며 더욱 훌륭한 연주를 위하여 이 곡은 또 다른 음악가에게 헌정되어졌다. 한편 시벨리우스의 전기작가인 타바시스테르나(Erik Tavaststjerna)는 이 같은 시벨리우스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시벨리우스는 버머스터를 위해서나 또 다른 어떤 바이올리니스트를 위해서 이 협주곡을 작곡한 것이 아니며 ...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이 협주곡을 작곡하였다. 오히려 그는 스스로가 일종의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것과 같은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그는 멘델스존이나 브람스와는 달리 바이올린 독주의 전문적인 테크닉 문제에 대해서도 다른 바이올리니스트의 충고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따라서 자연스러운 그의 상상력 속에서 그는 바이올린 협주곡의 독주자로서 자신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협주곡의 노스탤지어와 강한 낭만적인 성격에 대한 훌륭한 설명이 될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는 일찍부터 바이올리니스트로서도 재능을 나타내 보였던 시벨리우스가 바이올린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만든 이 협주곡에 대한 훌륭한 해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에 전해지는 이 협주곡의 개정판은 1905년 10울 19일 베를린에서... 당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하릴(Carl Halir, 1859~ 1909)의 바이올린 독주와 작곡가로서도 유명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지휘에 의해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여졌으며 이후 이 곡은 시벨리우스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근대 바이올린 협주곡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앨범 내지에서 발췌]

시벨리우스 Jean Sibelius [1865.∼1957] 핀란드의 작곡가. 본명 Johan Julius Christian Sibelius. 헤멘린나 출생. 9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15세 때부터는 바이올린과 작곡법을 배워 이 무렵부터 점차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가족들은 음악가가 되려는 그의 희망을 반대하여 1885년 헬싱키대학에 입학, 법률을 전공하는 사이사이 헬싱키음악원에서 베겔리우스에게 음악이론과 작곡을 배웠다. 그 후 음악을 전공하기 위하여 대학을 중퇴하고 당시 음악원 교수로 있던 명피아니스트 부조니에게 사사하였다. 시벨리우스는 본래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뜻을 품었으나 무대에 서면 상기하는 성격 때문에 연주가를 단념했다는 이야기는 그의 내성적인 성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정부의 장학금을 받아 베를린(1889)·빈(90)에 유학하고, 빈에서는 브람스를 만나 가곡에 호의적인 평을 받았다. 민족적인 소재를 통속적인 묘사에 빠지지 않고 유럽풍인 지적 묘사로 처리한 그의 작풍은 유학시절에 쌓은 지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92년 모교 헬싱키음악원의 작곡과 바이올린교수가 되고, 작곡면에서는 국민적 대서사시 (칼레발라에 의한 교향시) (크레르보) (엔사가) 모음곡 (칼레발라)등으로 국외에서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어 (투오넬라의 백조)를 비롯한 (4개의 전설)교향시 (핀란디아)(제1교향곡)등으로 명성을 얻고 1897년에 는 국가에서 종신 연금을 주기로 하여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아감에 따라 국외로의 연주여행도 많아 졌으나(제2교향곡)을 완성한 1902년 전후부터 4년간은 귓병으로 고생을 하고 1904년에는 헬싱키 교외의 별장으로 옮겨 여기에서 죽을 때까지 반 은둔 생활을 하였다. 24년 (제7교향곡) 이듬해의 교향시 (타피오라)이후는 거의 작품이 없고 뇌출혈로 91세의 생애를 마쳤다. 7개의 교향곡 외에도 많은 교향시·바이올린협주곡 등이 있고 (핀란디아)(투오넬라의 백조)등이 특히 널리 알려졌다. [Bochum:scholle/14.02.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