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annes Brahms(1833 ~1897)

브람스 / 피아노협주곡 1번 / Piano Concerto No.1 in D major, Op.15

scholle 2011. 11. 9. 20:09

Piano Concerto No.1 in D major, Op.15 브람스 / 피아노협주곡 1번

Johannes Brahms (1833 ~ 1897)

George Szell, Conductor Celveland Orchestra

제1악장 (Maestoso) d단조 6/4박자. 협주풍 소나타 형식

 

반음계의 인상적인 음형으로 시작되는데

마치 심장을 두드리는것 같으며 폭발할것만 같은

강한 위력의 서주의 길이가 엄청나다.

 

당시의 시대적 감각으로는 진부하리만큼 서주부가 길다.

그러나 극적인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게 음악에 빨려든다.

서주의 종결 후에 등장하는 피아노는

거장적 풍모가 아니고 오케스트라의 한 부분처럼 움직인다.

그것이 감동을 준다.

 

제 2악장 (Adagio) D장조 6/4박자. 3부 형식

"나는 당신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라고

브람스가 클라라 슈만에게 고백한 간접적인 사랑의 고백이다.

또한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오는 자에게 축복 있으라

(Benedictus qui venit in nomine Domini)"라는 기도문을 써넣었다가

나중에 지워버렸다고 전해지는 악장이기도 하다.

 

그런 때문인지 종교적 경건히 깃든 악곡이다.

특히, 피아노의 명상 어린 표정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런가하면 파곳과 클라리넷의 아름다운 칸틸레나가 돋보이는 악장이다.

 

 

제3악장 (Rondo,Allegro non troppo) d단조 2/4박자. 론도 형식

클라라에게 바치는 간절한 연가(戀歌) 일까?

청년 브람스의 분출하는 정열이 등장하는 제 3악장 론도에서

비로소 피아노는 독주 악기로서의 주장을 한다.

독주자의 영역이 확보되고 있는 음악인 셈이다.

카덴자가 두 번이나 허락되는 것도 이해될 만 하다.

 

전반적으로 이 협주곡은 베토벤의 영향

(특히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 3번)이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1850년대 중반기의

로맨티시즘의 흔적을 엿보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첫 번째 피아노 협주곡의 초연과 재연에서 실패를 경험한 직후

브람스는 "두 번째의 작품은 전혀 다른 소리로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라이프찌히의 청중들이

그의 작품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인 것에 심한 상처를 받은 브람스는

제 2번에 대한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나도 그의 두 번째 피아노 협주곡은 쓰여지지 않았다.

 

3악장(Rondo,Allegro non troppo)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Op.15 작품의 배경과 해설]

브람스가 그의 최초의 피아노 협주곡 작곡에 집중한 시기는

1856년부터 2년간이었다.

그러나, 이 협주곡의 시원(始原)은 1854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2월은 브람스의 스승인 슈만이 정신착란을 일으켜

라인강에 투신하는 비극적 사건이 있은 직후였다.

이 무렵 그는...

[2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완성해 놓고 있었다.

3악장 짜리 작품이었다.

 

그러나, 작품의 발표를 미루고 있다가 그해 여름에

제 1악장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하였다.

이때의 의도는 교향곡 제 1번으로 고쳐 쓰고자 했던 것이다.

허지만 이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계획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55년 2월 7일 밤, 브람스는 클라라 슈만에게 편지를 썼다.

"나의 불행한 교향곡은 피아노 협주곡으로 사용 됐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2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중에서 피아노 협주곡으로 채택된 악장은

제1악장 뿐 이었다.

제 2악장과 3악장은 전혀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 졌다.

이렇게 해서 1856년이 거의 저물어갈 무렵에

제 2악장 아다지오(Adagio)와 제 3악장 론도(Rondo)가 완성되었다.

 

초연은 1859년 1월 22일,

하노바에서 브람스의 피아노 독주와 요아힘의 지휘로 행해졌으나

이때의 연주는 '실패'로 기록되고 있다.

재연은 닷새 후, 당시 음악의 중심지였던 라이프찌히(Leipzig)에서 열렸다.

 

브람스는 그의 친구 요아힘(Joachim)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연주는 빛났지, 그러나 결정적인 실패였소".

작품의 탄생 배경에서도 눈치 챌수있듯이 이 작품의 탄생 동기가

교향곡에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피아노 협주곡에 비하면

교향악적인 비중이 대단히 높다는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이 작품을 일러서 '피아노 있는 교향곡'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칼 그레드너와 한스리크가 사용했다).

물론, 여기에서도 피아노는 독주 악기로서의 위상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그러나 여타의 협주곡처럼

피아노가 오케스트라를 압도하는 모습이 아니고

거의 대등하거나 혹은 피아노가 오케스트라 속에 녹아있는

독특한 면모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적인 특성보다도 우리가 더 관심을 가질 부분은

이 협주곡이 브람스의 청년기의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그의 '질풍노도의 시대'에 쓰여진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협주곡에서 그의 다른 작품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강렬한 빛깔의 정열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Bochum:scholle/09.11.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