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차이코브스키의
장례식에 운집한 수많은 군중드과 울음바다가 된 장례행렬
Pyotr Il'ich Tchaikovskii (1840∼1893)
Tchaikovsky Symphony No.6 in B minor, Op.74
1악장 (Adagio - Allegro non troppo)
2악장 (Allegro con grazia)
3악장 (Allegro molto vivace)
4악장 (Finale. Adagio lamentoso)
우수의 작곡가 차이코브스키 차이콥스키는
1840년에 태어나 1893년에 사망한 러시아 작곡가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재정 러시아의 말기로 극심한 혼란기이다.
1850년대 러시아는
크림 전쟁에서 패한 후, 군사적, 사회적 후진성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를 극복하려고 농노 해방 등 근대화가 시작하였으나,
이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해방된 농도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하지 못하였고,
각지에서 소수민족의 소요가 일어났다.
경제 공황 속에 노동 운동이 과격화 되어 혁명의 싹이 커져가고 있었다.
차이콥스키가 사망한지 불과 8년 후인 1905년에
제1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정도였으니 그 시기의 러시아의 상황을 짐작할수있다.
차이콥스키 그는 평생 우울증을 앓았다.
그는 콜레라로 어머니를 14세 때 여의었는데,
그의 우울증의 원인을 거기서 찾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대하여 항상 고민하였다.
1877년 제자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와 갑작스럽게 결혼했으나
그 결혼 생활이 파탄나는 바람에 오히려 그의 우울증은 극도로 악화되어
자살기도까지 하게 된다.
결국 차이콥스키가 유럽으로 요양을 떠나면서 그들은 헤어져 살게 된다.
이혼을 하지 않아 법적으로 부부관계는 그의 부인이 먼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후원자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콥스키의 예술을 사랑하고 지원했다
우울한 차이콥스키의 인생이었지만 그를 지켜준 것은 폰 메크 부인과의 관계였다.
폰 메크 부인은 그보다 9살 연상이고 많은 자녀를 가진 부유한 미망인이었다.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콥스키의 예술을 사랑하여
그에게 작품을 의뢰하여 후원하기 시작했다.
차이콥스키는 폰 메크 부인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냈는데,
그 중에는 결혼 생활에 고민을 토로하는 것도 있었다.
그 후 폰 메크 부인은 작품 의뢰 형식을 벗어나
아예 6000루불을 매년 연금으로 지불하는 형식으로 그에게 거액을 후원하게 된다.
그 조건은 서로 대면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6000루불은 음악원 교수 초임의 10배에 해당되는 정도로 풍족한 금액이었다.
차이콥스키는 이후 경제적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게 된다.
정신적으로도 폰 메크 부인에게 크게 의지하게 된다.
약 15년 동안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가 총 1200통이 넘을 정도였다.
그런데, 부인과의 관계가 1890년에 갑작스레 끝나게 된다.
부인은 파산하게 되어 더 이상 후원금을 주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부인의 경제 사정이 나빠진 것은 사실인 것 같으나 파산할 정도는 아니였다.
그 관계를 끊어야 할 만한 이유가 부인에게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차이콥스키는 그 이유를 알수 없었다.
초연 9일 후의 차이코브스키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러나 이미 그는 국제적 명성이 있는 작곡가로 더 이상 부인의 후원금이
꼭 필요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부인이 주는 정신적 지원은 대체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부인의 편지가 끊긴 후 그는 큰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그 후 차이콥스키는 절망을 떨치고 작곡에 매진하게 되는데,
그 마지막 작품이 교향곡 6번이다.
초연은 1893년 10월 28일 페트르부르크에서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지는데
특이한 곡 형식과 절망적인 느낌으로 인해 평판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초연 다음 날 차이콥스키는...
작품이 청중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작품에 표제를 넣을까 고민하였다.
그때 동생이 비창(Pathéthique)이라는 이름을 제안하여 즉석에서 악보에 써 넣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이 교향곡이 비창이 된 것이다.
비창 초연 후 차이콥스키는 9일 후에 갑작스레 죽게 된다.
그의 죽음의 원인은...
콜레라라는 것이 그의 전기에 쓰여져 있다.
죽기 며칠 전에 끓이지 않은 물을 먹고 콜레라에 점염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에 러시아는 콜레라가 만연되어 있어 그가 아주 위험한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도 자살설이 파다하였고
20세기의 연구가들도 그가 자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동성애의 추문을 피하고자 누군가가 그를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그가 죽기 직전까지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으니
병사가 맞다고 하는 이들도 여전히 있다.
이제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그는 그렇게 비극적으로 떠났다.
죽음에 앞서 폰 매크 부인의 이름을 여러 차례 불렀다고 한다.
그렇게 차이콥스키가 죽고 나서 비창이 다시 연주되었을 때,
이제는 관객들도 그의 뜻을 알았는지,
그의 죽음에 감명되었는지 연주회장이 울음 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Bochum:scholle/21.08.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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