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한곡이 연주되었었다"
이 도시에서 1년간 머물렀다.
그리고 그때에 그의 오케스트라 트리오 op. 1이 출판되었다.
그의 작품 가운데 대부분은 이 프랑스의 수도에서 출판되었다.
그는 협주곡과 실내악곡, 그리고 8곡의 성악곡을 작곡했는데
특히 D장조의 미사곡은 그의 생존시부터 유명했다
(1755년 8월 4일에 파리에서 연주되었다).
그러나 그를 중요한 존재로 만들고 있는 것은
현재 58곡이 알려져 있는 교향곡과
현악기만을 사용한 10곡의 오케스트라 트리오이다.
트리오는 오케스트라 음악과 실내악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곡들은 각 파트를 하나 또는 둘 이상의 악기로도 연주할 수 있다)
그의 초기의 교향곡은 현악기와 2대의 호른을 사용했다.
이 시기에 이은 다음 시기에는 그밖에 두 개의 플루트와
두 개의 오보에도 사용하게 되었고 초기의 것에는
두 개의 클라리넷도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초기 교향곡 가운데 5곡에서는 두 개의 트럼펫과 팀파니도 사용했다.
교향곡의 반 이상,
그리고 10곡의 오케스트라 트리오 중 9곡까지는
미뉴에트를 제3악장으로 한 4악장형식이다.
그는 크레셴도의 용법을 연구해서 오케스트레이션의 기법,
주제의 기법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는 이 기법들을 창작한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 이탈리아에서 기원한 이 양식적 특징을
이제 막 생기려는 교향곡이라는 장르에 적용시켰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점에서 또 그가 최초의 대표적 작곡가가 된
만하임 악파에게 부여한 영향에 의해서
요한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20세기 초에 특히 후고 리만의 노력에 의해서 재평가되었다.
그러나 요한 슈타미츠를 하이든의 주요 선구자라고 한
리만의 견해는 오늘날에 와서는 이미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칼 Carl (1745 만하임-1804 이에나)
작곡가, 바이올린 주자, 비올라 주자.
요한 안톤 Johann Anton의 아들.
처음에는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배웠고
이어서 칸나비히, 홀츠바우어, 리히터 밑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1762년부터 1770년까지 만하임 궁정악단의 제2바이올린 주자였다.
1770년 그는 파리에 갔고 노아이유 백작의 후원을 받았으며
백작을 따라 전유럽을 여행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파리를 떠난 것은 1777년으로 추정된다.
그후 독일 국내의 많은 도시를 순회하는 명연주자가 되었다.
칼은 수많은 실내악곡을 작곡했는데,
그의 명성은 특히 50곡 정도의 교향곡과 38곡의 협주교향곡
(두 개에서 일곱 개까지의 독주악기를 위한)에 의한 것이다.
또 수많은 협주곡(바이올린협주곡, 클라리넷협주곡,
플루트협주곡, 바순협주곡)과 비올라 다무르를 위한 작품도 남겼다.
[Bochum:scholle/20.02.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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