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교향곡 39번
Symphony No.39 in E flat major, K.543
Berliner Philharmoniker / Karajan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음악가
20세기 클래식의 상업화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로
부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를 ...
자기 현시욕과 재물욕이 유난히 강했던
기회주의자로 보기도 한다.
20세기 후반,
음악의 몰개성화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
반대로 어쨌든 그는 최고의 악단을
30년 이상 이끌어오면서 높은 완성도의 음반들을
양산해 고전음악의 저변이 확대된 결과를 낳았고
그의 연주중에는 많은 명연주들이 즐비하다는 의견도 있다.
어쨌든 푸르트벵글러-토스카니니의 시대가 막을 내리자
번스타인과 함께 새로운 시대의 카리스마를 이끈 것이
카라얀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나
4세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
역시 신동으로 각광받은 그는...
빈 국립음악원에서 프란츠 샬크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1927년,
19세의 나이로 울름(Ulm) 시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었으나 5년 만에 밀려나고 만다.
그래서 카라얀(Karajan)은...
1933년 나치 입당의 길을 선택했고,
34년 아헨 오페라극장의 지휘자,
35년 음악 총감독으로 임명되며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1937년과 38년에 빈 국립오페라극장과 베를린 필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 무대를 차례로 밟으며
전쟁기를 맞이하였고...
전쟁이 끝난후 1947년 해금되었지만...
어느 무대도 그를 웃는낯으로 반기지 않았다.
미궁에 갇힌 그의 손에 면죄부를 쥐어준 것이
EMI의 프로듀서 월터 레그가
필하모니아를 카라얀에게 맡겼던 것이다.
49년부터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되었으며
1955년 베를린 필에 입성한 그는
이듬해 종신 예술감독까지 요구해 성취했다.
그래서 카라얀의 전성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을 통한 레코딩과
연주여행을 통해 세계 곳곳에 ‘카라얀 포스터가 뿌려졌다.
80년대 들어,
베를린 필과의 불화가 대두되기도 했지만
‘음악계의 황제’로서의 그의 권력은 막강해져만 갔다.
89년, 죽기 3개월 전에야 그는‘종신’이라는
타이틀을 반납하고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그의 음악은..
후기 낭만주의의 연장 선상에 있다.
고전 레퍼토리보다는
낭만 이후의 레퍼토리에서 빛을 발한다.
그의 음반 중에서도
차이코프스키가 가장 큰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다.
마지막 녹음이 된 브루크너의 교향곡중에
7번 아다지오도 명연주 중 하나이며
그리고 말러 교향곡 9번(DG),
브람스 교향곡 1번(DG)도 대표적 명반으로 꼽을 수가 있습니다
[Bochum:scholle/24.02.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