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ph J, Raff (1822 ~1882)

라프 / 바이올린 협주곡 1번

scholle 2013. 6. 16. 06:19

Violin Concerto No.1 in B minor, Op.161 라프 / 바이올린 협주곡 1번 Joseph Joachim Raff (1822 ~1882) Hans Stadlmair, Cond Bamberg Symphony Orchestra 1악장 (Allegro patetico) Michaela Paetsch Neftel, Violin 2악장 (Andante non troppo ) Michaela Paetsch Neftel, Violin 3악장 (Allegro trionfale) Michaela Paetsch Neftel, Violin 한스 요하임 라프 (Joseph Joachim Raff(1822 ~1882) 스위스의 작곡가 ·피아니스트·교사.
라헨 출생. 가난해서 기초교육은 아버지로부터 받았으며 정규교육은 Gymnasium (독일 7년제 중학교)에
2년만 수료하고 귀향한다. 귀향후 학교교사를 지내면서 작곡·피아노·바이올린을 독학했다. 1843년 작품을 J.L.F. 멘델스존에게 보내 그 추천으로 브라이트코프츨판사에서 op.2∼14가 출판되었다. 여기에 용기를 얻어 작곡에 전념, 리스트의 초대로 그의 순회연주에 동행했고, 46년에는 쾰른에서 음악 잡지
(세실리아(Cäcilia)에 그의 평론이 실리기도 했다. 1847년에는 멘델스죤을 공부하기 위한 라이프치히의 여행이 그가 근무하는 피아노 상회의 주인의 사망으로 실패하고 슈트트가르트로 가게된다.
그곳에서 영원한 우정을 갖게되는
폰 뷜로와 만나기는 하나 1848년의 혹한기에 슈트트가르트를 떠나야만 했다.
리스트의 도움으로 함부르크에 일자리를 얻게되고, 51년 바이마르에서 리스트의 도움으로
오페라 (알프레드왕)이 공연되었다. 1853년 그의 부인이 될 바이마르 궁정 극장 감독이며 배우의 딸인 도리스를 만나게 된다. 리스트와의 교류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리스트의 교향시 몇 개는 라프가 오케스트레이션을 도왔다. 56년 비스바덴으로 옮겨와 피아노 교사로 활동, 63년에는 최초의 교향곡 (조국에)로 빈의 악우(樂友)협회상을 받았고, 77년 프랑크푸르트의 호흐음악원 원장이 되었다. 그는 나이 60세에 과로에 의한 심장마비로 눈을 감는다. 그의 방대한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인,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카바티나(cavatina)외에는 그리 연주되지 않지만, 교사로서 많은 후진을 육성한 공적이 크다. 밤베르크 교향악단 (Bamberg Symphony Orchestra,1941~ ) 독일의 나치 군대가 프라하를 장악하게 되자 프라하 거주 독일 음악인들은 그것을 빌미로 삼아 하나의 악단을 창설하여 프라하 음악계를 지배 해 보려는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들의 계획은 나치 점령군들의 비호를 받으면서 착착 진행되어 41년 10월에 정식으로 창단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때 붙여진 이름은 `프라하 도이치 필하머니'였다. 그리고 초대 상임 지휘자로 독일 출신의 요세프 카일베르트를 맞아들여 본격적인 연주에 들어 갔다. 프라하 도이치 필하머니는 창단 이후
나치 당국의 전폭적인 지원과 비호를 받으면서 비인`베를린`드레스덴`라이프찌히 등지로 연주여행을 다녀와 그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이 순회연주를 지휘한 카일베르트 역시 자신의 이름을 유럽 음악 무대에 알린 계기로 삼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역사는 제자리 걸음을 하지 않아서 나치는 패전의 쓰라림을 안고 연합군에게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독일은 전범국으로 몰려 모든 요인들이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에 회부되는 형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프라하 도이치 필하머니를 지원하던 나치 문화정책 관리들도 이러한 역사의 심판대 위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프라하 도이치 필하머니를 창단시킨 독일 음악인들은 더 이상 프라하에 머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독일로 이주한 뒤 체코에 가까운 소도시 밤베르크에 다시 모였다. 그리고 흩어진 오케스트라의 재건을 도모하여
연주 활동을 속개함으로써 프라하 도이치 필하머니의 명맥을 이어나간 것이다. 그리고 이 때를 기점으로 하여 악단의 이름도 현재의 B.S.O로 개칭했으나, 지휘자는 카일베르트를 그대로 존속시켰다.
이렇게해서 프라하 도이치 필하머니 밤베르크 심퍼니로 번혁을 본 BSO는 당초의 설립지였던 체코의 프라하를 떠나 제2의 창단지인 독일의 밤베르크로 본거지를 옮기게 되어, 다른 악단에서 찾아볼수 없는 특이한 유랑의 역사를 지니게 된 것이다. B.S.O로 개칭된 이후에도
카일베르트는 68년에 급서할 때까지 23년간을 헌신적으로 지휘하여 BSO의 발전을 도모했다.
그가 죽은 뒤로 볼프강 자발리쉬가 3년 간 지휘하다가 거장 오이겐 요훔에게 인계되어 정상의 수준으로 육박한 오케스트라로 끌어올려진 것이다. 특히 요훔이 BSO를 이끌고 있는 동안에 그와 친분이 두터운 케뮤게`클뤼탕스` 케르테츠 등이 BSO를 찾아 와서 수시로 객연했는데, 이 또한 BSO가 근대적인 연주단체로 체제 정비를 갖출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카일베르트에 의해서 오랫동안 갈고 다듬어진 B.S.O가 요훔이라는 거장을 만나 활짝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1993년 9월 밤베르크 콘서트 홀을 지어 정착하였다. 유럽 각지와 아프리카·아시아 등지에서 연주회를 개최하여 호평 받았다. [사진출처:처음처럼] [Bochum:scholle/15.06.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