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ing Quartet No.10 in Eb major, Op.51 'Slavonic(Slawisches)'
드보르자크 / 현악4중주 10번 '슬라브적' Vlach Quartet Prague
Anton Dvork (1841∼1904)
1악장 Allegro ma non troppo
2악장 Dumka(Elegia)
3악장 Romanza, andante con moto
4악장 Finale, allegro assai
체코 프라하 근교의 드보르작 박물관
고요하고 유혹적인 첼로의 선율로 시작하는 현악 4중주 Op.51은
드보르자크가 흔히 취하는 방식인
'멜로디 풍성하게 만들기'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1악장 알레그로에서 두개의 주제는
드보르자크의 독특한 창작이긴 하지만
전통 민요 선율을 기막히게 예술적 기품이 가득한 것으로 만들었다.
2악장 안단테는 이른바 '둠카(dumka)형식의 섬세한 곡이다.
'슬라브적'이라는 제목의 의미도 이 악장에서 가장 크게 와 닿는다.
3악장은 짧은 로만차인데 비장한 기분이 들 정도로 우울하다.
4악장 피날레는 스코치나(Skocna)라는 댄스 리듬으로 열정적으로 도약한다.
안톤 드보르작(Anton Dvork)은
많은 훌륭한 작곡가들 중에서 출생에 관한 한 유난히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그가 태어난 곳은 프라하에서 북쪽으로 45마일 가량 떨어진
보헤미아 지방의 비타바 강 연변에 위치한 넬라호제프라는 조그만 마을로,
부친은 여관과 푸줏간을 소유한 지방 유지로서 주위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평화롭고 목가적인 농촌 분위기와 독실한 카톨릭 신앙을 가진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어려서는 지방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의 부친은 노래를 즐기고, 바이올린, 치타르도 연주할 줄 아는
재능있는 음악가이기도 했으며,
그의 아들이 보여준 음악적 재능에 크게 만족하며,
어린 드보르작이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게 되자
그를 마을 악대에 들여보내 주었다.
드보르작이 처음 학교 교육을 받은 것은,
오르간 주자이기도 한 그 지방학교의 교장으로 부터였으며,
줄로니스의 초등학교로 진학을 했을 때는 그의 숙부집에서 기거하며
훌륭한 음악가였던 교장 선생으로부터 오르간, 피아노, 바이올린 등의
악기와 기초 화성악을 배울 기회를 갖게 되었다.
드보르작의 아버지는
그를 뒷받침하는데 드는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이 음악가로서 성장하는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숙부의 도움으로 드보르작은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로 진학을 할 수 있었다.
재학기간 중 드보르작은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재능있는 학생이었고,
졸업시에는 오르간주자와 합창 지휘자의 자격을 취득하게 되었다.
졸업 후, 당시 인기있는 작곡가인 카렐 콤삭이 지휘를 맡고 있던
오케스트라에서 잠시 연주생활을 한 후,
곧 스메타나가 지휘자로 있는 체코 국립관현악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학교를 졸업한 해인 1859년에서 1870년 사이,
드보르작은 상당량의 작곡을 할 수 있었고,
그 중에는 [줄로니스의 종]이라는 부제를 가진 그의 첫번째 교향곡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곡은 한동안 악보가 분실된 것으로 여겼으나 1923년 다시 악보가 발견된 바 있다.
1870년대 후반에 출판된 [모라비아 이중주]는
곧 성공작이 되었고 이 곡은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
이후 드보르작은 프라하 음악계의 총아로 등장하고,
곧 이어 유럽 전역에 이름을 떨치는 작곡가가 되었으며,
칭찬에 인색한 영국인들조차 머지않아 그의 뛰어난 재능에 찬탄을 보낼 정도였다.
이런 세속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드보르작은 여전히 신앙심 깊고 단순하게,
가족과 함께 조촐한 생을 즐기는 삶을 살았으며
이러한 그의 성향은 오히려 그의 성공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 그가 믿는 것들에 대해서는 확고한 주관을
내세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초기에 그의 음악은 바그너와 브람스의 음악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점이
뚜렷하지만, 그가 점차로 유년시절에 들으며 자랐던 보헤미아 민속음악의
풍요함에 눈뜨게 됨에 따라 그의 음악은 그 나름의 독특한 색채를 띄게 되고,
1890년대에 들어서서는 그는 '당대에 가장 뛰어난 작곡가'
'음악계 최고의 재능' 등의 칭호를 받고 있었다.
지휘자 한스 폰 뵐로는 좀 더 친밀한 표현으로
그를 '겉으로는 마치 연관공처럼 보이는 천재'라고 부르기도 했다.
1889년에 작곡된 교향곡 제8번과, 1895년에 작곡된,
브람스에게 너무도 깊은 감명을 주었던 첼로 협주곡은
그의 최고의 걸작이자 가장 사랑받는 두 곡으로 작품 곳곳에
보헤미아의 깊은 정서가 베어 있다.
1892년 새로 설립된 미국 음악원의 초청을 받은 드보르작은
그 초청을 수락, 초대 원장에 취임코자 유럽에서의 명성을 뒤로하고 뉴욕으로 향했다.
이 음악원은 한 미국의 백만장자 부인인 쟈넷 서어버 여사에 의해 설립 되었으며,
당시 그녀가 내건 조건은
드보르작이나 시벨리우스를 원장으로 모셔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드보르작은 혼쾌히 이 초청을 수락했으며,
이는 그가 미국의 새로운 음악적인 조류를 창조해 내는데
정열을 바칠 각오가 돼 있음을 의미했다.
[Bochum:scholle/29.11.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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