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llet Suite for Orchestra in D major, Op.130
레거 발레모음곡
Max Reger (1873~1916)
바이레는의 북부 파르츠의 브란트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교육자인 부친에게 오르간, 바이올린, 첼로를 모친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다시 오르간 주자 린터너 (A.Lindner)에게 1890년 까지 사사받았다.
13세 때는 교회의 주일 예배에서 린트너 대역으로 오르간을 연주하기에 이른다.
학교 성적도 좋아 15세 때 상을 받고 바이로이트에 가서
마이스터징거와 파르지팔을 접하고 큰 감명을 받아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린트너에게 저명한 이론가 후고 리만의 저작으로 이론을 배우고
더우기 1890년 4우러부터 1893년 까지 직접 리만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와 병행해서 1890-96년 비스바텐의 음악원에서 피아노, 오르간, 이론도 가르쳤다.
병역을 마친 뒤 가족과 함께 뭔헨으로 옮겨 작곡에 몰두 햇다.
그리고 비스바텐에서 사귄 엘자 폰 베르캔(Elsa von Bercken)과 1902년 10월에 결혼했다.
1905년부터 뮌헨 왕립음악원에서 작곡과 오르간을 가르치고 이 무렵부터 오르간 작곡가로서도 점차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7년 라이프치히의 음악원 오르간과 교수에 취임한다.
1908년에는 예나 대학으로부터,
1910년에는 베를린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1911년 12월에는 작센=마이닝켄 공의 궁정악장도 겸했다.
그와 동시에 실내악 및 가곡의 피아노 주자로서 연주여행도 하게된다.
그러나 1914년 신경통으로 인해 마이닝켄의 지위를 사임하고
1915년 예나에 정주, 그후 각지로의 연주와 라이프치히의 교수로 나가게 되었다.
1916년 5월 11일 라이프치히의 호텔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레거는 리스트=바그너 진영에 과감하게 반항하여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고. 표제적인 음악을 쓰는 것도 피했다.
그는 바하를 깊이 연구하고 베토벤과 브람스를 존경했으며
스승 리만이 이룩한 음악이론을 기초로 해서 독자적인 이론 체계를 확립,
그것을 자기의 창작에 적용햇다.
정력적인 사람이었던 만큼 작품의 수도 많으며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성악곡 등을 남겼다.
그러나 교향곡은 없다.
이들 작품에 있어서 레거는 작곡 기교,
특히 대위법과 변주법, 음악형식에서 발군의 능력을 발위했다.
그 형식 자체는 옛형식을 채용한 것이었지만
화성은 기능화성법을 거의 한계까지 추진했고
조바꿈은 매우 대답하고 자유 자재로우며 빈번하다.
레거의 작품은 화성적으로는 낭만주의 음악
종말의 양상조차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내용적으로는
종종 종교적인 분위기와 감성에 치우치고
때로는 신비성과 낭만적인 환상도 담는다.
그러나 여러번 생각해서 원고를 가다듬는 일이 적고
작곡상의 수완을 스스로 억제하는 경우도 별로 없으며
또 강한 대비 효과와 극적인 긴장에도 큰 관심을 주지 않은 채
작곡 기교의 편중에 빠지고 말았기 때문에 사후에는 그 음악을 경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는 그의 음악을 재인식하는 소리도 일고 있다.
레거는 후기낭만주의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과도기의 작곡가로 간주할 수있다.
그리고 이시기의 대표적인 변주곡 작곡가이다.
그에게는 당연히 문하의 작곡가는 있으나 그의 양식을 답습하여
이름을 떨친 사람은 없다.
몇개의 음악적인 저작도 있으며 그 중에서는 조바꿈에 관한 책이 유명하다.
[Bochum:scholle/25.05.2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