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c 창고]

에이미 비치-피아노 협주곡 in C sharp minor, Op. 45

scholle 2015. 12. 3. 19:11

에이미 비치-피아노 협주곡 in C sharp minor, Op. 45

지그프리드 란다우(지휘) 베스트팔렌 교향악단

Amy Beach -Piano Concerto in C sharp minor, Op. 45

Siegfried Landau (Cond) Westfalisches Sinfonieorchester Mary-Louise Boehm (Piano)

(1867 ~1944)

Amy_Beach

1. Allegro moderato

2. Scherzo: Vivace

3. Largo

4. Allegro con scioltezza

 

미국 음악역사상 가장 뛰어나고 위대한

여성 작곡가로 평가되는 전형적인 천재형의 음악가다.

 

대부분의 여성 작곡가들이 가곡 등

비교적 규모가 작은 작품의 창작에 머문 데 반해

에이미는 미사, 교향곡, 협주곡, 오페라 등 대작에 속하는

작품들을 많이 썼을 뿐 아니라 그 작품들의 완성도도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 동부 뉴햄프셔 헨니커(Henniker)에서 제지업을 하던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이자 성악가였던 어머니 사이에

무남독녀로 태어난 그녀는...

 

1살 때 이미 40곡의 노래를 부를 줄 알았고

2살때는 어머니가 부르는 노래에 즉흥적으로 알토화음을 붙여서

노래할 정도로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또 4살 때는 글을 익혔고 간단한 형식의 왈츠를 작곡했다.

6살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1년 후에 청중 앞에서 헨델, 베토벤, 쇼팽

그리고 자신이 작곡한 소품으로 리사이틀을 열었다.

 

8살 때 가족이 보스턴으로 이사했다.

에이미에게 유럽식 교육을 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부모는 학교 대신에 개인교수를 고용하기로 결심하고

에른스트 페라보(Ernst Perabo)와 카를 베르만( Carl Baermann)을 피아노 교사로 초빙했다.

 

14살 때는 처음으로 주니어스 힐(Junius W. Hill)에게

화성학과 대위법을 배웠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누구에게도 더 이상의 작곡법을 배우지 않고 오로지 독학으로 작곡법을 터득했다.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통째로 외워서

그것으로 화성을 분석하고 대위법 기술을 익히는 방법 따위가

그녀의 독학하는 방법이었다.

그녀의 공식적인 데뷔는 1883년이었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사단조와

모슈레스의 협주곡 사단조를 협연하면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했다.

이 연주가 큰 반향을 일으켰고 얼마 후엔 보스턴 교향악단의 솔로이스트로 선정되었다.

 

그해 겨울 월터 담로시가 지휘하는 뉴욕심포니(뉴욕 필하모닉의 전신)가

쉴러의 시 [빨리 지나가는 구름]에 의한 알토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을 초연했다.

이곡은 뉴욕 심포니가 연주한 첫 여성 작품이었다.

 

1885년,

그녀가 18살 때 저명한 외과 전문의이자 스물네살 연상인

헨리 비치 하버드대 교수와 결혼한 후에는

아내가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렸던 남편의 권유를 받아들여

1년에 한번 자선을 목적으로 열리는 연주회에만 나가는 것을 제외하고서는

오로지 작곡에만 전념했다.

 

작곡가로서 거둔 첫 성공은 1892년에 헨델과 하이든 협회가 주관한

연주회에서 발표된 내림 마장조의 미사곡이었다.

이 협회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여성 작곡가의 작품이 연주된 음악회였고,

 

이 곡의 성공으로 그녀는 단숨에 미국을 대표하는

최초의 여성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다.

1893년엔 컬럼비아 박람회에 세워진 여성회관을 위한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다.

 

1910년에 남편이 죽자 3년간 피아니스트로 유럽을 여행했다.

그 결과 유럽에서도 에이미는 작곡가와 연주자

모두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1914년에 미국으로 돌아왔고 이듬해에 청소년 음악도를 위해

작곡에 필요한 십계명을 썼다.

 

여기에다 그 자신이

독학 과정에서 경험했던여러가지 구체적인 사항들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뉴욕으로 이사한 그녀는

성 바르톨로메 성공회 성당의 상주 작곡가로 새로운 삶을 갖기 시작했고,

미국 여성작곡가협회의 총재 등 몇 개의 음악과 관련된

단체의 리더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0년에 심장병으로 은퇴했고 1944년에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제2 신 잉글랜드 악파, Second New England School]

또는 [보스턴 그룹으로 불려지는 일단의 작곡가들,

존 페인(John Knowles Paine), 아더 푸트(Arthur Foote),

조지 체드윅(George Chadwick), 에드워드 맥도웰(Edward MacDowell),

조지 와이팅(George Whiting), 호라티오 파커(Horatio Parker) 등

기라성 같은 남성 작곡가들 사이에 유일한 여성이었던 에이미는...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방대한 작품목록과

다양한 작품세계를 펼쳐보였던 위대한 작곡가였다.

그녀의 작품 스타일은 브람스와 라흐마니노프의 경우처럼

로맨티시즘에 속하는 것이고 실제로 그 두 작곡가의 작품에 비교되었다.

 

게다가 그녀의 화성은 매우 이국적인 매력가지 겸비하고 있어서

매력을 느끼게 한다.

주요한 작품으로는 내림 마장조의 미사곡, 테 데움,

겔릭 교향곡, 바이올린 소나타,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5중주곡, 피아노 트리오, 몇 곡의 합창음악,

실내악, 발칸 주제에 의한 변주곡 등 피아노 독주곡,

약 150곡의 가곡, 오페라 [카빌도]가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은

[3개의 브라우닝 가곡] op.44 중 [그해의 봄, The Year’s At the Spring]이다.

 

그녀의 작품은 거의 대부분 생전에 출판됐다.

1898년 '음악에서의 여성' 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작곡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이를 거절했다.

1915년 그녀는 자신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활동의 제약을 받은 일은 없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2000년 7월, 보스턴의 유명한 해치 쉘(Hatch Shell) 비치에

보스턴 팝스가 세운 화강암 비석에 ...

바흐, 헨델, 쇼팽, 드뷔시, 베토벤, 모차르트, 맥도웰 등

86명의 저명한 작곡가의 이름을 새겼는데 에이미는 거기에 새겨진 유일한 여성 작곡가였다.

 

이에 앞선 1999년엔 오하이오의 신시네티에 소재한

미국 클래식 음악 명예의 전당에도 그녀의 이름이 헌액 된바 있었다.

1994년엔 보스턴 그녀의 자택 앞에 동상이 건립되었고,

1995년엔 포레스트 힐(Forest Hills) 묘지에 그녀의 영원한 쉼터가 마련되었다.

[내용설명:곽근수의 움악이야기]

 

[Bochum:scholle/03.12.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