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c 창고]

살리에리A(ntonio Salieri) 3중 협주곡 라장조

scholle 2016. 7. 29. 19:13

Concerto for Violin, Oboe, Violoncello Orchestra in D Major "Triple"

살리에리A(ntonio Salieri) 3중 협주곡 라장조

Antonio Salieri (1750 ~1825)

 

[전악장 이어듣기]

I. Allegro moderato 9:27

II. Cantabile 7:53

III. Andantino 8:02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지휘자.

천재의 삶은 항상 극화된다.

극화될 수 없는 삶을 살았어도 극화될 수밖에 없다.

극화를 통해야 그 천재성은 더 애절하게 우리 가슴을 저며오기 때문이다.

 

피터 쉐퍼(Peter Shaffer)의 희곡에 기초한

영화 ‘아마데우스’의 극적 인상 때문에,

우리는 신의 총애를 독차지한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질투하여

십자가마저 벽난로에 던져버리는 안토니오 살리에(Antonio Salieri, 1750~1825)의

비극적 삶을 연상하기 마련이지만...

 

실상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죽음과 직접적 관련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살리에리는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 요제프 2세의 총애를 받았던 궁정작곡가로서,

당대 음악가로서 최고의 지위인 호프카펠마이스터(대악장)에 올랐으며,

실제로 그의 오페라 작품들은 18세기 후반의 유럽 사회를 풍미한 걸작들이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조차 최고의 평판을 누렸다.

 

그의 프랑스어 오페라인 '타라레(Tarare,1787)'는

당대 이미 모차르트의 작품 '돈 조반니'(Don Giovanni)보다 더 인기가 높았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묘사한것처럼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만 허락하고 재능을 허락지 않았다고

신을 저주해야 할 입장에 있었던 살리에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신화적 이야기는

푸시킨이 1830년에 쓴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며,

림스키 코르사코프도 오페라<모차르트와 살리에리 Mozart et Salieri>(1898)를 썼다.

 

특히 피터 쉐퍼의 희곡을 영화화한 '아마데우스'(1984)는

'천재' 모차르트와 '범재' 살리에리를 두 축으로 설정하여,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재능을 시기한 나머지 병고에 시달리는 모차르트에게

레퀴엠을 짓도록 강권하여 그를 죽음으로 내몬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일련의 허구(?)적인 것들이

오랜 시간 당대의 살리에리를 왜곡시켰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더욱 분명한 것은 반골 기질의 모차르트 자신이 살리에리를

좋아하지는 않았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될 사실이다.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1750년 이탈리아의 레냐고(Legnago,당시 오스트리아 영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이었으며,

유년기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타르티니(Giuseppe Tartini)로부터

음악을 배웠던 그의 형인 프란체스코(Francesco)로부터

바이올린과 하프시코드를 배웠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파두아(Padua),그리고 베니스(Venice)로 이사하였다.

베니스에서 당시 저명한 오르가니스트였으며 작곡가였던

죠반니 바띠스타 페세티(Giovanni Battista Pescetti)로 부터 화성악을 배웠다.

 

1766년 레오폴드 가스만(Florian Leopold Gassmann)을 만났는 데

그것이 살리에리의 음악가로서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가스만은 어린 살리에리를 비엔나의 궁정으로 초대하여

음악전반에 걸쳐 체계적인 교육을 시켰다.

 

살리에리는 그곳에서 음악을 공부하는 한편 작곡가로,

특히 오페라,실내악,종교음악에서 높은 명성을 쌓았다.

 

1770년에 이르러 빈 오페라 계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여류 문인들 La donne letterate](1770.1 상연),

[아르미다 Armida](1772.2 상연)로 일찍부터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확립하였다.

 

그 후 빈에 머무르며,

1774년 스승 가스만이 별세하자 황제 요제프 2세의 의해

궁정작곡가 겸 이탈리아 오페라의 지휘자가 되었다.

다시 궁정 악장으로서 가스만의 뒤를 이은 본노(G.Bonno)가 죽자,

1788년에 궁정 악장이 되어 사망 직전인 1824년까지 그 지위에 있었다.

 

그의 오페라들은 18세기말 전유럽에서 갈채를 받았다.

1778-80년에 베네치아,로마,나폴리 등지에서 공연을 하였는 데,

특히 밀라노에서 스칼라좌의 낙성식을 위하여 만든

[마음에 든 유럽 L'Europa riconosiuta]을 상연하여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1781년에 빈으로 돌와서 처음으로 징슈필을 썼다.

 

또한 1784년 부터는 글룩에 이어 파리에서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으며,

즉 글룩과의 공동 작품인 오페라 [다나이드,Les Danaides]가

1784년 파리에서 상연되어 성공을 거두고,

또1786년 파리에서 초연된 오페라 [오라스 Les Horaces]역시 성공을 거두어 기반을 다졌다.

 

이 무렵부터 의식적으로 글룩의 오페라 양식을 흡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 음악 취미가 바뀐 것을 자각하여 창작량을 감소시켜 갔으며,

1804년을 끝으로 오페라를 쓰지 않게 되었다.

그와 전후하여 글룩의 전통을 이어받는 대가로서 후진 지도에 힘을 기울였다.

 

하이든과 베토벤과 친교를 맺었고,

특히 베토벤에게는 대위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가 하이든의 중요한 2개의 오라토리오를 지휘한 우정담이나,

베토벤이 그를 위하여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3곡의 소나타(Op.12,1797)를 헌정하였다는 이야기 등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슈베르트,체르니,훔멜,리스트,모셀레스의 음악을 후진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빈에서 18세기의 오페라 서법을 19세기의 기악 작곡가들에게 전승시킨 점은

그의 교육 활동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었다.

 

그의 첫 오페라 [여류문인들,Le donne letterate]은 1770년 빈의 부르크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빈 궁정 악장 재직중 오스트리아의 극장들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극장들을 위해서도 여러 오페라를 작곡했다.

40곡이나 되는 오페라는 독일풍으로 씌어졌고 선율및 극적 표현이 뛰어나며,

특히 성악처리가 훌륭하였다.

 

오페라 외에도 미사,오라토리오 등의 종교음악,기악곡도 남겼다.

생전에 작곡가 혹은 지휘자로서 대단한 명성을 누렸던 살리에리는

1823년 정신착란을 일으켜 한 차례의 자살소동을 겪은 후,

1825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때에 그가 작곡한 레퀴엠이 연주되었는데,

이는 곡이 완성된 후 최초의 연주였다.

주요 작품

《여류문인들 Le donne letterate》(1770)

《Armida》(1771)

《베네치아의 정기시장》(定期市場, 1772 초연)

《La scuola de' gelosi》(1778)

《Der Rauchfangkehrer》(1781)

《오라스 Les Horaces》(1786)

《타라르 Tarare》(1787)

《Axur, Re d'Ormus》(1788)

《Palmira, Regina di Persia》(1795)

《Falstaff o sia Le tre burle》(1799)

 

[Bochum:scholle/29.07.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