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A, Schumann (1810∼1856)

클라라 슈만 피아노 협주곡 가단조 Op.27 2악장

scholle 2011. 6. 22. 04:37
클라라 슈만 피아노 협주곡 가단조 Op.27 2악장 Romance Clara Schumann 슈만(Schumann)은 1834년 나이 24세에 무리한 피아노의 연습 탓인지 오른손 중지와 약지에 마비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연주자로서의 희망을 서서히 접고 작곡, 지휘, 평론의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전화위복이라고 할까 !.. 슈만의 명성은 이 쪽에서 빛을 보았다. 음악 비평가로서는 손색이 없었던 그는 쇼팽과 브람스의 음악을 세상에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이었다. 슈베르트의 음악을 보급하는 데에도 힘을 쓰고 있었다. 그가 편집하고 있는 음악신보(Neue Zeitschrife fur Musik)는 거침없이 비판의 소리를 낼수있는 매체 역할을 하였다. Clara Schumann 1838년 그는 빈의 슈베르트 묘지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슈베르트의 형 페르디난트의 집을 찾아갔다. 그때 형은 동생이 남긴 미발표 작품, 교향곡(Symphony No. 9 "The Great" D. 944 in C Major)의 초고를 슈만에게 주었다. 그리하여 이 아름다운 작품은 슈베르트 서거 10년만에 빛을 보게 되었다. 슈만은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창작 활동을 하였다. 40년은 가곡의 해로 그의 창작 활동이 극점을 이루는 시기였으며, 독일 낭만파 가곡의 대표적 작품들을 양산한 해이다. 이해의 첫 가곡집 '리더크라이스'도 하이네의 시로 작곡한 것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하이네의 시집 '노래의 책'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집 '시인의 사랑'이다. 슈만이 18세 때 하이네를 만나 깊은 감명을 받은 후 하이네의 시로 많은 가곡을 썼다. 다음해인 41년은 교향곡의 해, 42년은 실내악의 해, 43년은 오라토리오의 해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이다. 슈만과 하이네의 인연은 지금도 뒤셀도로프에 남아있다. 하이네의 고향이며, 슈만 부부가 라이프치히와 드레스텐을 거쳐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다. 슈만이 살던 빌커슈트라세 15번지 노란 3층집 벽에는 '슈만과 클라라가 1852년 9월 1일 부터 1854년 3월 4일 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는 기념판이 붙어있다. 슈만의 집 길 건너에 하이네 연구소가 있다. 슈만의 집과 같은 길가인 빌커슈트라세 4번지에 슈만 협회가 있다. 슈만 협회장의 말을 빌리자면 슈만이 뒤셀도르프에서 시립음악단장을 역임하면서 말년의 창작생활을 하던 곳이기 때문에 이곳을 택했다고 한다. 슈만의 단추와 지팡이 클라라의 양산까지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슈만을 추모하는 것만이 주임무가 아니라, 그의 이곳 생활을 병마와 관련시켜서만 생각하는 잘못을 해명하고, 아직까지도 오류가 발견되는 슈만의 악보를 총 정리해서 원작대로의 전곡집을 출판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한다. 슈만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1844년이다. 클라라와 함께 러시아로 연주 여행을 갔을 때, 현기증과 불안증이 심해져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귀국 후에도 독살의 불안, 금속성의 공포에 시달렸다. 거기에 청력 장애까지 나타났다. 1849년에는 건강이 많이 호전되어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의 장면들을 솔로, 합창, 오케스트라를 위해 30곡 정도 작곡하였다. 1850년 뒤셀도르프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초빙되었으나 단원과의 의사소통이 힘들고 지병인 류마티즘과 우울증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환청까지 들리기 시작하여 1853년 가을 지휘자에서 해임되고, 10월 정신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른다. 이제 클라라 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그녀의 어머니는 한때 촉망 받던 소프라노였고 남편 비크의 제자였다. 클라라는 태어나기 전부터 위대한 음악가가 될 신동을 낳아 기르겠다는 부모들의 꿈의 대상이었다. Goethe는 클라라를 여섯 명의 소년 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는 소녀 (The girl has more power than six boys.)라고 극찬을 할 정도의 연주자였다. 슈만이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클라라와 함께 연주 여행을 할 때면 클라라의 음악성에만 청중들은 갈채를 보냈다. 워낙 섬세하고 민감한 슈만으로서는 감당하기 괴로웠다. 아내에게서 받는 열등감도 그의 정서 불안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신동의 소리를 들으며 화려하게 데뷔한 클라라지만 8명의 자녀를 낳아 기르느라 음악 활동은 소강 상태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슈만의 입원으로 고통과 실망의 세월을 살아야했다. 두 사람 사이의 불화도 이 때 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슈만이 집을 나와 빗속을 걸으며, "클라라, 나는 너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은 사람이야."라고 중얼거렸다는 것은 가슴에 맺힌 응어리의 발로일 것이다. 슈만은 자신의 천재성에 비해 생시에 인정을 받지 못한 음악가였으니 안타울 뿐이다. 맨발로 라인강까지 뛰어가 투신할 정도로 그의 병세는 악화되었다. 1856년 정신 질환에 시달리던 슈만에게 후각과 미각에도 이상이 생겼다. 다리에 부종이 겹치면서 건강은 악화 일로에 놓였다. 7월 28일 전신에 경련이 일었고 29일 46세를 일기로 극적인 인생을 마감했다. 이제는 클라라가 슈만의 아내로 만 기억된다는 사실도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겠는가? 슈만이 사망한 후 클라라는 남편의 서한집과 작품전집을 편집했다. 슈만, 쇼팽, 브람스의 작품을 소개하는데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들 작품에 대한 연주 해석은 오늘날에도 규범이 되어있다. 클라라는 말년에 프랑크푸르트 음악학교의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Grab von Robert und Clara Schumann 본(Bonn)에 있는 슈만의 무덤(Friedhof)에 세워진 기념상에는 남편의 부조를 바라보고 있는 클라라의 전신상이 추가되었다. 본인의 간절한 요청에 의한 것이라 전한다. 아내의 조각상이 함께 있다는것은 예외적이지만 인상적이다. 슈만이 타계한지 꼭 40년 후인 1896년 클라라도 남편 곁에 묻혔다. [Joseph Kim /칼럼니스트] [Bochum:scholle/21.06.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