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édéric Chopin(1810~1849)

쇼팽 ‘바르카롤(뱃노래)Chopin, Barcarolle in F sharp major, Op.60

scholle 2014. 9. 5. 00:38

Frédéric Chopin(1810~1849)

Chopin, Barcarolle in F sharp major, Op.60

쇼팽 ‘바르카롤(뱃노래)

Frédéric Chopin(1810~1849) Krystian Zimerman, piano

Wien-Film, Rosenhugel, Wien(1987.02) Krystian Zimerman - Chopin,

Barcarolle in F sharp major, Op.60

카날레토의 그림. 18세기 베네치아 항구의 모습

 

1.Allegretto

2.Poco piu mosso

3.Tempo primo

‘피아노의 시인’ 쇼팽이 남긴 피아노 소품들 중에는

‘야상곡‘ 연습곡‘ 전주곡‘ 폴로네즈 ‘마주르카’ 등과 같이

일정한 형식이나 개념에 따라...

여러 곡을 시리즈 또는 그룹으로 묶을 수 있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그와는 대조적으로,각각이 개별적인 악곡으로 존재하는 단품들도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뱃노래는 환상곡과 더불어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비교적 큰 규모와 내러티브적 흐름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발라드나 스케르초의 연장선상에 놓을수 있는 작품이다.

 

통상 연주시간 8~9분 안팎의 이 아름다운 피아노곡은

우아한 선율과 풍부한 화성, 소재들의 정밀한 취급,

잘 정돈된 구성 등 여러 탁월한 면모들로 인하여 쇼팽의 가장 뛰어난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무엇보다 유려하면서도 드라마틱한 전개 속에서 빛과 그림자를

절묘하게 교차시킨 그 흐름은 쇼팽이 후기에 도달한 원숙한 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한편으론 노앙(Nohant) 시절 말기의 굴곡진 여정도 일정 부분 투영하고 있는 듯하다.

 

클래식 음악에서 ‘뱃노래(바르카롤)’란

베네치아 곤돌라 뱃사공의 노래에서 유래한 악곡을 가리킨다.

통상 ‘뱃노래’는 보통 빠르기에 8분의 6박자 또는 8분의 12박자를 취하며,

파도나 배의 흔들림을 암시하는 단조로운 반주가 수반된다.

 

이러한 형식을 취한 피아노곡으로는 쇼팽의 것 외에

멘델스존의 무언가에 포함된 몇 곡과 포레의 곡들이 유명하며,

그 밖에 오펜바흐의 ‘호프만의 뱃노래’ 등 성악곡도 있다.

 

쇼팽이 그의 유일한 ‘뱃노래’를 작곡한 것은

1845년에서 1846년 사이의 일로 알려져 있다.

그 무렵 쇼팽은 어느덧 나이 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한층 새롭고 성숙한 작품들을 계속해서 선보이고 있었다.

 

그중 1844년의 피아노 소나타 3번,

1846년의 폴로네즈 환상곡은 쇼팽의 작품세계에서 정점에 놓인 걸작들이다.

그리고 이 뱃노래 역시 자유롭고 폭넓으며 견고한 구성,

대담하고 치밀한 화성 어법, 풍부하고 독창적인 환상성 등으로 요약되는

‘만년의 양식’이 오롯이 반영된 최상급의 걸작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아울러 첼리스트 오귀스트 프랑숌과 나눈 우정의 산물인

‘첼로 소나타’ 또한 이 시기의 빛나는 결실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 무렵은 조르주 상드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고질적인 건강 문제도 가중되던 시기와 겹친다.

 

1845년 여름에 쇼팽은 조르주 상드의 저택과 영지가 있는

노앙에 머물면서 3곡의 새로운 마주르카(Op.59)를 작곡하고

뱃노래의 초고를 완성했는데,

이때부터 쇼팽과 상드, 두 사람 사이의 균열이 본격화했던 것이다.

 

불화의 빌미는 상드의 아이들이 제공했다.

특히 아들 모리스는 이전부터 쇼팽과 사이가 안 좋았다.

모리스는 어머니의 젊은 연인(쇼팽은 상드보다 6세 연하였다)을 늘 못마땅하게 여겼고...

어머니의 모성애가 자신보다 쇼팽에게 향하는 것을 질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의 남편 노릇을 하려고 드는 쇼팽과 사사건건 충돌했고,

스무 살을 넘기면서부터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자신의 입지와 권위를 노골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모리스가 쇼팽에게 충직했던 폴란드인 하인을 해고한 일은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만했다.

또 1846년 여름에는 두 사람이 집안일로 논쟁을 벌이자

상드가 모리스의 편을 들면서 쇼팽이 상처받는 일도 일어났다.

 

조르주 상드 반면에 딸 솔랑주는 쇼팽을 잘 따랐다.

솔랑주는 오빠 모리스와는 달리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이였다.

어려서부터 이상하리만치 어머니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자란 그녀에게

따스한 배려와 애정의 손길을 내민 사람이 바로 쇼팽이었다.

 

다행히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와의 관계도 호전되어,

열일곱 살 즈음에 솔랑주는 한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처럼 평화롭던 어느 날

상드가 수양딸을 들여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 이해 못할 사건이 일어났다.

 

더구나 나이 많은 이복자매는 천박한데다 배려심도 없었다.

솔랑주는 결혼을 통해서 탈출구를 찾으려 했고,

그 과정에서 쇼팽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쇼팽과 상드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쇼팽과 상드, 본인들에게 있었다.

일단 성격 면에서 보수적 봉건주의자인 쇼팽과 급진적 공화주의자인 상드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끌려 한동안 연인 사이로 지냈지만, 

아이들 문제를 계기로 긴장과 갈등이 불거지자 결국 파경에 이르렀다.

 

사실 쇼팽을 향한 상드의 애정은 이성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는

모성애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런데 쇼팽이 집안일에 끼어들고 점점 남편 행세를 하려고 하자,

자존심 세고 독립심 강한 상드로서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1846년 초, 상드는 ‘루크레치아 플로리아니’라는 제목의

자전적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의 연인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에서

상드는 자신과 쇼팽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비꼬았다.

 

주인공 루크레치아의 입을 빌려 카롤 공작을 이기적이고 가식적이며

신경질적인 남자로 묘사했고, 그의 종교적 신념과 정치 철학을 비웃었다.

소설은 얼마 후 파리의 한 잡지에 연재되었고,

쇼팽과 상드의 관계를 익히 아는 지인들과 파리 사람들은 경악했다.

 

쇼팽을 흠모했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기막히게 쓰인 혐오스런 소설을 통해서

그녀는 나의 친구 쇼팽을 너무도 막되게 취급했다.”

결국 그 책이 출간된 직후 둘 사이의 모든 것이 틀어지고 만다.

 

1847년 6월 말, 솔랑주의 결혼을 둘러싼 갈등이 폭발한 직후

상드가 쇼팽에게 결별의 편지를 보냈고,

두 사람의 관계는 그 지점에서 막을 내렸다.

 

행복의 나날을 꿈꾸며 이상의 과정에 비추어보면,

뱃노래는 쇼팽과 상드의 불화가 차츰 표면화되던 시기에 작곡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곡에서 그 시절의 갈등이나 고뇌, 지친 심신의 흔적은

그다지 부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곡은 한가로운 뱃놀이 내지는 배위 연인들의 대화라는

‘뱃노래’ 본연의 기능에 충실한 것처럼 보인다.

 

많은 이들이 이 곡의 어두운 면보다는 밝은 면을 바라보았고,

그 특유의 여유로움과 충일감을 만끽하고자 했다.

 

잠시 철학자 니체의 말을 옮겨보자.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든 모든 인생에는 행복한 순간들이 있게 마련이다.

바로 이 순간들을 포착해내는 것이 훌륭한 예술가가 하는 일이다.

 

따분하고 소금에 절인 듯이 열악한 환경을 제공하는 바닷가 생활조차도

그러한 순간들을 가져다준다. …

뱃노래에서 쇼팽은 이 행복의 순간을 참으로 훌륭하게 노래하고 있다.

이것을 듣는다면 신들조차도 나룻배에 누워 긴 여름밤들을 보내고픈 생각이 들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중에서]

 

들라크루아가 그린 쇼팽과 조르주 상드.

한창 루크레치아 플로리아니를 진척시키고 있었던 어느 날,

상드가 노앙의 저택을 찾은 손님들과 쇼팽 앞에서

신의 연재소설을 큰 소리로 낭독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참석했던 화가 들라크루아에 따르면,

흥미롭게도 정작 쇼팽 자신은 그 소설의 내용에 별로 개의치 않는 것처럼,

심지어 소설의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또 나중에 솔랑주의 편을 들다가 상드에게서 분노에 찬 편지를 받았을 때에도

쇼팽은 곧바로 답장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그 모든 갈등은 ‘찻잔 속의 폭풍’으로 지나가고

머지않아 평온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건 아니었을까

 

곤돌라처럼 흔들리는 서정시 혹은 서사시

쇼팽의 뱃노래는 그의 야상곡처럼 도입부와 종결부를 지닌 3부 형식(A-B-A)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다만 기존의 일반적인 ‘뱃노래’들이 8분의 6박자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비해,

쇼팽은 8분의 12박자를 택함으로써 호흡을 길게 가져가면서

‘이탈리아적인’ 선율선을 더욱 유창하게 펼쳐 보일 수 있었다.

 

베네치아의 곤돌라 곡은 알레그레토로 지정된 5마디의 도입부로 출발하는데,

묵직한 C?음에서부터 차츰 F?장조로 이행해가는 이 도입부를 앙드레 쾨루아는

‘점차로 희미해지는 일종의 즉흥곡’이라고 규정하면서

그 화성과 음향의 흐름이 드뷔시에게 미친 영향을 지적한 바 있다.

 

인상적인 도입부가 은은한 여운과 함께 잦아들면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고,

곧이어 제1부로 들어가 물결 또는 곤돌라의 흔들림을 암시하는

리듬 패턴이 왼손에서 떠오른다.

이 일정한 리듬 패턴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가운데 섬세하고 영롱하게 노래하는 듯한

칸타빌레 주제가 등장한다.

 

트릴이 효과적으로 덧붙여진 이 주제는 세밀한 변화 속에

긴장과 이완을 넘나들며 유연하게 흘러간다.

이어서 제2부로 접어들면 앞에서와는 다른 리듬 패턴에 기대어

A장조의 새로운 주제가 등장한다.

 

이 주제는 도중에 갑자기 16분 음표로 내달리는 아르페지오 장식음형을 취하면서

더욱 화려한 진행을 보인다.

이후 음악은 정밀한 분위기의 경과부를 거쳐 제1부의 흐름으로 복귀하고,

한층 풍부한 변화와 기복이 큰 흐름을 빚어내다가 드라마틱한 고조에 이른다.

 

이와 관련, 알프레드 코르토는

“어떤 낭만적 야상곡도 이보다 더한 열정과 부드러운 굴곡을 들려주지는 못할 것”이라며

찬탄한 바 있다.

종결부에서는 오른손이 음계를 부드럽고 우아하게 오르내리는 가운데

신비로운 느낌의 전조가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양손의 옥타브 연주로 힘차게 마무리된다.

 

1845년 가을, 쇼팽과 상드는 아직 그럭저럭 평화로운 공존을 이어 가고 있었다.

쇼팽이 잠시 파리에 머물던 그 시기에

두 사람은 매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지켜내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했던 듯하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햇빛 찬란한 이탈리아로 1년 동안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했다.

비록 그 계획은 모리스의 훼방으로 무산되었지만,

그 무렵 쇼팽은 상드와 이탈리아에서 보내게 될 행복한 한때를 꿈꾸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나온 긴장과 갈등의 나날을 물결에 흘려보낼 그날들을 고대하면서 말이다.

한편 필자는 이 곡을 들으면서

가끔씩 프랑스 시인 아폴리네르의 시구를 떠올리곤 한다.

그 물결과 감수성의 흐름, 그 행간에 자리한 탄식 어린 상념을 세심하게 포착하고

음미하는 것이야말로 쇼팽의 뱃노래를 감상하는 자세와 서로 통하지 않나 싶기 때문이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른다

기억해야 하는가!

기쁨은 언제나 괴로움 뒤에 온다는 것을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Bochum:scholle/05.09.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