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uxtemps Violin Concerto No.4, 4th mov
비외탕 / 바이올린 협주곡 4번(Henri Vieuxtemps,1820~1881)
1악장 (Andante moderato)
2악장 (Adagio religioso)
3악장 (Scherzo Vivace)
4악장 (Andante -Allegro)
비외탕 [Vieuxtemps,Henri,1820.2.17~1881.6.6]
비외탕은 모두 7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남겼다.
벨기에의 바이올린 연주자.
베르비에 (Verviers)출생.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여 유럽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하였으며
아버지에게 음악의 기초를, 루쿨루와 안젤로 베리오에게 바이올린을,
지몬 제흐터(Simon Sechter)와 안톤 라이하( anton Reicha)에게 작곡을 사사.
이어 여러 차례 유럽 순회 공연을 했고
미국에서도 3번(1843~44,1857~58,1870~71)이나 순회공연을 했다.
1846년 부터 1852년까지는
상크페테르브르크의 궁정음악연주가로 있으면서
그곳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871년부터 1873년까지는 브뤼셀 음악원의 교수로 있었다.
상트페테르브르크 음악원에서도
러시아 바이올린 연주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브뤼셀 음악원에서는
뇌졸증으로 사임해야했다.
극도로 정밀한 기교적 연주와 풍부한 음역을 한데 혼합한 것이 특징인
그의 연주 양식은 널리 모방이 되었다.
그는 19세기 기교적 연주자 계보의 길을 연 초기 연주자 중 한사람이며
그의 작품들 역시 기교적 연주에서 선구적 영역을 개척했고
특히 바이올린 협주곡 1~7번은 이 형식의 발전에 기여했다.
1833년 비외탕은 늘 엄격한 연습을 고집하던 그의 아버지와 함께
음악적 지평을 넓히기 위해 독일로 연주여행을 떠났다.
거기서 그는 당시에 저명하던 음악가들
슈포어(Louis Spohr), 몰리끄(Wilhelm Bernhard Molique),
마이세더(Joseph Mayseder)를 만나고
그들의 음악을 접하게 된다.
비외탕은 순회연주 도중 지몬 제흐터(Simon Sechter)에게
대위법을 배우고
베에토벤과 가까이 지내던 음악가들의 사교 모임에 합류하게 되면서
1834년 초 비엔나에 정착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당시 실질적으로 거의 잊혀지다시피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익히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비외탕은 2주간의 연습끝에 이루어진 1834년 3월 16일의 연주회에서
베에토벤의 협주곡을 성공적으로 복원시키게 된다.
지휘자이자 비엔나 음악원학장이었던 란노이( Eduard von Lannoy)는
그의 연주가 " 독창적이고 참신하면서도 고전적이다"라며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라이프찌히에서는 작곡가 슈만으로부터
그의 연주가 파가니니에 비견된다는 평을 듣는 등 연주여행을 통해
비외탕의 명성이 독일전역에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필하모닉 소사이어티(Philhamonic society)에서 이루어진
그의 런던 데뷔 무대는 독일에 비하면 그리 열광적인 파장을 일으키지는 못하였으나
그곳에서 자신에게 음악적 영감을 심어주고
당시 런던 전체를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린 바 있는 파가니니를 만나
음악적 조언을 듣게 된다.
비외탕은 1836년 초 까지 라이하 (Antom Reicha)에게 작곡을 배우며 파리에서 지냈다.
그는 스스로 비오키 협주곡의 웅장하고 장대한 형식의
근대의 테크닉적 진보에 화려한 기술을 결합시킨 곡을 쓰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 바로 파가니니로부터의 음악적 영행을 명백히 보여주는
바이올린 협주곡 f# 단조 (나중에 협주곡 제 2번 op.19로 출판되었다)이다.
라이하 밑에서 작곡 수업을 마친 비외탕은
1837년 유럽을 돌며 연주 여행을 다시 시작하였다.
특히 러시아에서 공전의 성공을 거두었는데
1840년 3월 16일 상트페테르브르크에서는 근간에 작곡된
'환상 카프리스 (Fantaisie caprice) op11'과 제 1번 협주곡이 초연되기도 하였다.
첫번째 협주곡의 성공여파는 브뤼셀에서도 이어졌으며
1841년 1월 12일 파리에서 베를리오즈는
"훌륭한 독주자로서의 기량이 넘쳐나는 비외탕은 이제 작곡가로서도
그에 못지않은 명망을 얻고 있다"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1841년 4월 19일에 비외탕은 다시 런던을 찾아 무대에서 열정을 불태웠다.
그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게된다.
그는 런던을 자주 방문하였고 1845년 첫 시즌부터 베토벤 4중주 모임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1843~1844년, 피아니스트 탈베르그(Talberg)와 함께 한
1857~1858년, 그리고 1870~1871년 3회에 걸친 미국 연주 여행을 성황리에 끝냈다.
러시아 황제의 전속 궁정 음악연주자로서
그리고 러시아의 바이올린 연주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는 등
성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교수로 지냈던 1846~52년의 5년동안
비외탕은 러시아에서 절찬을 받는다.
그곳에서 그의 가장 독창적인 작품으로 불리우는
바이올린 협주곡 제 4번 d단조를 완성하고 1851년 12월 파리에서 연주하였다.
베를리오즈는 제 4번 협주곡을
'바이올린 솔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장대한 교향곡'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한편, 비에니아프스키가 가장 아끼는 곡으로 유명해진
비외탕의 협주곡 제 5번 a 단조는 1861년에 완성되었다.
1844년에 비엔나 출신 피아니스트 요세핀 에더(Josephine Eder)와 결혼한 비외탕은
1855년 프랑크프르트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였으나
1866년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2년 후에 예기치 않은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게되자
그는 해외연주여행에 몰두하여 그로 인한 성공을 통해 스스로를 위안하였다.
1871년 비외탕이 미국에서 돌아 왔을 때 그는 브뤼셀 음악원으로부터 교수 제의를 받게된다.
그는 벨기에 바이올린 악파를 혁신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큰 포부를 가지고
전력을 다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바이올리리스트 이자이(Eugene Ysa ye)도 이 시기 그의 제자중 하나였다.
그러나 1873년에 갑자기 찾아온 중풍으로 몸이 마비된 비외탕은
비에니아프스키에게 자신의 교수자리를 임시로 위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1877~8년부터는 병세가 호전이 되어
조금씩 레슨을 재개하게 되었지만 1879년에는 학교측으로부터 결국 사임당하게 된다.
병마와 싸우던 그는 2년후
알제리 무스타파( Mustapha )의 한 요양소에서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Bochum:scholle/05.02.2016]
'Henri Vieuxtemps (1820~1881)'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외탕 / 바이올린 소나타 D 장조 (0) | 2016.02.10 |
---|---|
비외탕 / 바이올린협주곡 5번 "그리트리" (0) | 2016.02.05 |
비외탕 / 바이올린 협주곡 1번 (0) | 2016.02.04 |
비외탕 / 바이올린 협주곡 제6번 G장조 Op. 47 - 제라르 풀레 (0) | 2013.06.16 |
Vieuxtemps - Sonata for Viola and Piano in B flat major, Op. 36 (0) | 2011.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