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vard H, Grieg(1843∼1907)

그리그 / 홀베그르 모음곡 Op.40 / Holberg Suite Op.40

scholle 2009. 4. 8. 22:06
그리그 / 홀베그르 모음곡 Op.40 Holberg Suite Op.40 Edvard Hagerup Grieg 1843∼1907 1884년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으로 작곡하여 1885년에 현악합주용으로 편곡하였다. 작품번호 40번이다. 노르웨이 출신 덴마크 극작가 루드비그 홀베르그(Ludvig Holberg)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작곡한 것으로 1884년에 초연되었다. [전주곡 prelude][사라반드 sarabande] [가보트와 뮈제트 gavotte musette] [아리아 aria]〈리고동 rigaudon]으로 구성되며,... 그리그가 바흐와 헨델 등에 의해 유명해진 프랑스풍 모음곡의 형식에서 착상을 얻어 작곡한 곡이다. 곡 전체에 18세기 음악 양식과 낭만주의적 표현, 그리고 노르웨이 민속음악 고유의 감미로움이 배어 있고... 작곡기법이 매우 섬세하며 그리그 특유의 뛰어난 선율감과 신선한 음악적 사고가 돋보인다. 피아노를 위하여 작곡한 원곡도 자주 연주되지만, 뉘앙스나 정서가 훨씬 풍부한 현악합주용이 더욱 인기있다. 1악장/ Prelude -Allegro Vivace 2악장/ Sarabande - Andante 3악장/ gavotte Musette 4악장/ Air Andante 5악장/ Rigaudon - Allgro con brio 홀베르그 (Holberg, Ludvig) 덴마크의 철학자 ·극작가 국적 : 덴마크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노르웨이의 베루겐 주요저서 : [도덕적 사고] 노르웨이의 베루겐 출생. 육군 장교인 아버지가 그를 노르웨이에서 낳았기 때문에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각각 자기 나라의 위인(偉人)으로 추앙한다. 젊은 시절부터 견문을 넓혔고, 당시 유럽에서 문제가 되었던 사물을 연구하기 위해 널리 외국을 여행하여, 그 성과를 [유럽 각국사 서론(各國史序論)](1711) 으로 발표하였다. 그 후 덴마크에 정착하여 1717년 코펜하겐대학의 형이상학(形而上學)교수와 라틴어 수사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덴마크사(史)][교회사(敎會史)]등의 대저(大著)외에, 철학서인 [도덕적 사고]등으로 덴마크 철학의 기초를 쌓았으나, 오히려 극작가로서 더 유명하다. 그의 극(劇)은 1722년 코펜하겐에 설립된 극장에서 덴마크어로 상연하기 위해 쓴 것으로, [정담가(政談家)][산실(産室)][산(山)의 에페]등 32편을 창작하였다. 덴마크의 몰리에르’로 불리는 그의 작품은 특히 사실주의와 자유로운 인간성을 깊이 있게 추구하였으며, 심리적 통찰이 날카롭다. 출처 [EnCyber] 에드바르트 그리그 (Edvard Grieg, 1843~1907, 노르웨이) 노르웨이의 항구도시 베르겐에서 태어난 국민주의 음악가, 그리그는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같은 베르겐 출신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올레 불의 인정을 받아, 그의 권유로 15세때(1858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유학하여 4년간 작곡과 피아노 주법을 배웠다. 1862년 졸업 후 베르겐으로 돌아온 그는 거기서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 정식 데뷔했다, 귀국 후 21세 때, 같은 노르웨이 출신의 젊은 작곡가였던 노르드라크와 깊은 우정을 맺고, 그의 영향을 받아 그리그는 완전히 국민주의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이듬해 코펜하겐으로 옮긴 그리그는 덴마크 작곡계의 대가인 닐스 가데와 리하르트 노르트라크를 만나 오이테르페 협회를 발족, 노르웨이 작곡가들의 작품 연구와 연주활동에 주력했다. 1865년에 로마로 여행했고, 1870년에 리스트의 초대로 재차 로마를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1868)을 연주한 리스트는 그를 매우 극찬하였다 유명한 그의 [장송 행진곡]은 잠시 로마에 있던 시절에 노르트라크의 사망 소식을 듣고 작곡한 곡이다. 다시 노르웨이로 돌아온 그리그는 ... 오슬로 음악원 부원장, 필하모니아 협회의 지휘자 등을 겸하면서 작곡가에 몰두했으며, 여류 성악가 니나 하게루프를 사랑하게 되어, 안데르센의 시에곡을 붙인 가곡 [나 그대를 사랑해]를 작곡하여 유명해졌고, 그들은 결혼해서 오슬로에서 생활했다. 또 1867년에 오슬로 음악 협회를 조직하여 7년간 지휘자로 활약했고, 1874년 31세 때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국가의 종신 연금을 얻어 작곡에 전념했다. 그 후 고향인 베르겐이나 오슬로에서 주로 생활했다. 1885년부터는 베르겐에서 조금 떨어진 트롤드하우겐에 집을 짓고 쇠약해진 몸을 요양하면서 전원 생활을 즐겼다. 이 사이에 가끔 라이프찌히, 로마, 파리, 런던 등지를 여행하여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의 아내 니나는 그리그의 가곡을 직접 불러 보급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그리그는 1907년에 영국으로 연주 여행을 떠날 때, 배를 타기도 전에 병이 무거워져 베르겐의 병원에서 9월 4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그는, 1877년부터는 로프트휘스에 틀어박혀 작품 창작에만 몰두하며, 세상을 떠나는 1907년까지 피아니스트로서의 발표회도 쉬지 않았다. 그가 남긴 [교향적 무곡][서정 모음곡][제3 바이올린소나타] (1885∼1887), 피아노곡인 [노르웨이의 농민무용](1902) 등은 견고한 하모니와 감수성이 노르웨이 민속정서와 잘 어우러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사랑받고 있다. 특히 입센의 부수음악으로 작곡한 [페르귄트](1876 초연)는 가장 유명한 곡이다. [Bochum:scholle/08.04.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