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Field (1782~1837)

John Field - Nocturnes - No.14,15,16

scholle 2011. 2. 4. 07:03

John Field - Nocturnes - No.14:15:16

존 필드의 야상곡 John Field (1782 ~1837)

 

그의 시대 이전까지 관현악 편성곡, 협주곡 등

대곡위주의 연주취향을 친근하고 가벼운 피아노 연주스타일로 바꾼

소품 음악의 창시자이다.

글린카(Glinka) 스포(Spohr) 훔멜(Hummenl) 등이 필드(John Field)와 동시대를 살며

그의 피아노 곡을 보고 들으며 영향을 받았다.

 

당시 소위 '비엔나 학파' 상징이었던

클라라 슈만의 아버지이자 스승이었던 프리디리히 비이크(F. Wieck)가

'필드 학파'로 완전히 흡수되는 결과를 제공한 연주가로도 알려져 있다.

 

외부세계를 잊은 채 구부정하게 피아노 앞에 엎드려

불필요한 스테이지 제스쳐를 없애고 곡의 핵심을 연주하는 존 필드의 연주 양식은

심지어 이후 20세기 신즉물주의로 대표되는 박하우스까지 연결되는 본류이기도 한다.

 

'녹턴 Nocturn'하면 모두들 쇼팽을 떠올리겠지만

피아노 소품으로서의 녹턴을 처음 시도한 사람은 존 필드(John Field. 1782-1837)였다.

 

다소 우울하고 애조 띤 선율로 꿈을 꾸듯 자유로이 활보하는

오른손의 선율과 정형된 화음을 따르는 왼손과의 최상의 극치는

녹턴이 세기를 넘어 사랑받은 음악적 이유다.

 

라틴어 'Nox'에서 파생되어 로마시대 '밤의 신' 이란 뜻으로 통용되었지만

필드는 이러한 감성적이고 자유로운 음악 형식에

보다 카톨릭 교회의 기도 양식의 하나인 '밤의 기도(Nocturn)에서 명칭을 따온다.

 

현재 남아 있는 1813년에서 1835년 사이에 작곡한

모두 18개의 피아노곡의 일부에 녹턴이란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이후 녹턴은 그 이름 개념 그리고 스타일면에서

거의 20년 후의 쇼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이후 최고의 대중적 사랑을 받는 양식이 된다.

리스트와 멘델스존을 비롯해서 포레, 글라주노프

그리고 메트너(Metner) 등이 어떠한 특별한 형식,

메시지, 구조적 얽매임이 없는 이른바 '언어 없는 노래',

녹턴 양식에 깊이 매료되었고 그들의 시대에 따라 론도나 변주곡의 주제로,

그리고 협주곡이나 실내악곡의 한 악장을 장식하는 주제 선율로

다양하게 변이 되었지만 '음악은 언어가 떠나간 곳에서 출발하는

감정의 의사소통 기구'라는 낭만적 신념을 아직도 충실히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 양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존 필드(1782-1837)는 아일랜드 출신이다.

그의 유년시절 잊을수 없는 추억하나는 12살 때

웨일즈 왕자가 런던에서 주최한 콘서트에 데뷔했다는 사실이다.

필드에게 운명의 힘이 주어졌다.

 

드디어 클레멘티(1752-1832)의 계보에 입문하게 된 것이다.

1795년 필드는

클레멘티가 운영하는 피아노 제작소에 세일즈맨으로 취직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피아노 구입자를 위해 연주를 들려주는 일을 했다.

대가는 물론 클레멘티의 레슨을 받는 것이었다.

 

클레멘티는 어렸을 때 모차르트에 비견되는 신동이었고,

1781년 12월에는 빈에서 황제 요제프2세의 명으로

모차르트와 피아노 경연을 가진 바 있다.

 

그는 베토벤의 친구였으며...

80년의 생애를 살아가는 동안 유럽에서 누구 못지않은 음악적 명성을 누렸다.

재미있는 사실은 필드가 '녹턴'을 창시하여 쇼팽에 영향을 미쳤다면

그의 스승인 클레멘티는 적어도 피아노 음악에서 만큼은

베토벤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존 필드가 살았던 시대의 피아노는

모차르트가 피아노 작품을 썼던 시대의 피아노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형태가 바뀌고, 크기가 커지고, 기계적으로도 크게 개선된 피아노였다.

 

이피아노는 어떠한 셈 여림의 수준에서든 충실하고 탄탄한 음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시대의 작곡가들은 한껏 발달된 피아노로 인해

표현적이든 압도적이든 예술적 기교의 요구를 모두 총족시킬 수 있었으며

피아노를 최고의 낭만적인 악기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필드의 '환타지아'는

바로 이러한 피아노의 메카니즘을 위대한 예술로 바꿔놓은 예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초에는 두 개의 두드러진 피아노 연주 유파가 있었다.

그 하나는 명확한 짜임새와 유창한 기교를 강조했는데,

모자르트의 제자 흄멜이 대표적이다.

 

베토벤에 속했던 유파는 충실한 음향, 넓은 강약의 폭, 관현악적 효과,

극적 표현, 풍부한 기교력등을 중시했다.

이 두 양식 모두가 클레멘티의 작품에 나타나 있다.

 

Muzio Clementi(1752-1832)

어쨌든 클레멘티는...

'피아노 음악의 아버지 (웨트트민스터 성당 그의 묘비명에 이렇게 적혀있다)였다.

클레멘티는 다시 필드를 낳았다.

필드는 1802년 스승을 따라 유럽 연주여행을 시작했다.

첫 기착지였던 파리에서 바흐의 푸가와 헨텔의 작품을 연주하여 호평을 받고,

최초의 소나타집을 출판했다.

빈을 거쳐 1804년엔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 정착,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유럽대륙 대부분을 편렵했다.

 

1823년부터는 모스크바에 체재했으며

1831년 필드는 다시 모스크바를 떠나 파리,벨기에,스위스,이탈리아로 갔다.

그는 나폴리에서 큰 병을 얻어 쓰러졌는데

러시아에 있는 그의 가족이 그를 모스크바로 데려가기까지

수개월 동안 병마에 시달려야 했다.

 

모스크바로 돌아가던 중 빈에 들렸을 때 카를 체르니를 방문했으며,

라흐마니노프 일가와 러시아의 후원인 덕분에 그곳에서 일시적으로 요양했다.

이곳에서도 사람들은 '녹턴'의 작곡가로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러시아로 돌아간 뒤 필드는 다시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1837년 모스크바에 묻혔다.

[Bochum:scholle/03.01.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