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로 줄리아니-키타 협주곡 2번 A장조.36
Mauro Giuliani-Guitar Concerto No. 2 in A major, Op.36
Neville Marriner (Cond)
Academy of St. Martin-in-the-Fields Mauro Giuliani (1781~1829)
Pepe Romero (Guitar)
1. Maestoso
2.Andantino
3.Rondo (Allegretto)
이탈리아 작곡가이자 기타 연주가.
마우로 줄리아니(Mauro Giuliani)는 모렛티,카룰리,카르카시등
이탈리아 악파의 음악가중에서 가장 유명했던 거장이며,
페르난도 소르(Fernando Sor)와 나란히 기타(Guitar)음악의
고전시대를 꽃피웠던 이태리의 작곡가이자 기타 연주가였다.
소르의 우아하고 명쾌한 대위법적인 악풍에 비해
줄리아니는 호탕하고 직선적이며 장엄한 음량의 표현을 특징으로 하는
천부적인 작곡가였다.
마우로 줄리아니는 1780년 아드리아 해를 끼고 있는
이탈리아 비셀리에(Biscegile)에서 태어났으며
형과 함께 바리에타(Barietta)에서 음악 공부를 하였다.
마우로 줄리아니는 정식 음악교육으로 대위법과 첼로를 공부했으나,
곧 기타에 흥미를 가졌으며 독학으로 배웠지만,
단 시일내 당대의 가장 탁월한 기타리스트가 될 정도로
기타에 전념하여 기교와 연주상의 이론에서 뛰어난 재능을 이룩하였다.
그가 누구에게 배웠으며 이탈리아에서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줄리아니는 바리에타에서
마리아 쥬세페 델 모나코(Maria Giuseppe del Monaco)와 결혼하여
아들 미카엘을 낳았고 잠시 동안 블로냐와 트리스테에서 머물며
대위법을 배웠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는 가족들을 바리에타에 남겨둔 채
비엔나에서 프로라인 빌무스(Fräulein Willmuth)라는 여인을 만나
1807년에 딸 마리아를 낳았다.
당시 이태리에서는 오페라가 성행했기 때문에
그의 재능을 보여줄 기회가 거의 없어, 유럽으로 연주여행을 다녔으며,
결국에는 음악의 중심부인 비엔나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거기서 그는 연주자와 작곡자로써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일련의 대 작곡가들 훔멜,스포어,디아벨리 등과 같은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비엔나에서 정통 기악연주에 익숙하게 된 그는
1807년 부터 자신의 곡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전 유럽으로 연주여행을 하게 된 그는
대가적 연주로 자신의 음악적 풍취를 소개하여 가는 곳 마다 찬사를 받았다.
그의 성공은 대단한 것이어서 19세기 초,
비엔나에서 활동하던 음악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그리고 다양한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연주자로 명성을 쌓게 되었다.
당시 유럽음악의 정황에서
기타의 새로운 역할을 정립한 줄리아니는
이제 베토벤,롯시니같은 비엔나 최고의 음악가들과도 친교를 맺게 되었다.
1815년 피아니스트 훔멜을 비롯한 당대의 이름있는
현악 연주자들과 함께 비엔나의 유서 깊은 쇤브룬(Schonbrunn)궁전의
정원에서 일련의 연주회를 열어 입장료를 金貨(Ducat)로만 받기도 하였으며
(이 연주회들은 후에 "Dukaten Concerte"),
1875년에는 베토벤의 7번 교향곡 초연에서 첼로연주자로 참여하였다.
1804년 4월 3일 레두덴잘아카데미에서 줄리아니의 기타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A장조 op.30의 초연이 있었으며,
줄리아니는 이날 기타도 직접 연주했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연주회에는 청중의 한 사람으로 베토벤이 참석,
줄리아니의 기타에 도취되어 열광하였으며,...
"기타는 그 자체가 작은 오케스트라다"...라는 유명한 말로
줄리아니의 연주를 극찬했다 한다..
음악평론가 구스타프 쉴링(Gustav shilling)은
그날 연주평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줄리아니는 매우 비상한 기타 테크닉을 지녔다.
그의 음색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아마 지금까지 활약하는 기타리스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거장일 것이다"...
유명 연주자들을 많이 배출하였으나,
거래를 하였던 출판업자가 그의 작품의 대부분을
기타를 위한 작품을 위주로 출판하였던 관계로 작곡가로서 줄리아니는
비엔나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1819년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비엔나를 떠나게 된 그는
트리스테와 베니스에서 잠시 머문 후에 로마에 도착하여
1개의 협주곡을 비롯하여 몇 작품을 썼으나 크게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823년 부터 아버지의 병환때문에 나폴리를 자주 여행하였는데,
자신의 기타 작품이 인기가 있음을 알고 그곳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1826년 부르봉 왕가의 궁정에서 일을 맡게 된 줄리아니는
1828년 부터 건강이 나빠져 다음 해 5월 8일 나폴리에서 눈을 감았다.
당시 줄리아니의 죽음에 애도를 금치 못했던 어느 유명한 평론가가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줄리아니가 울려주는 음색은 기타라는 악기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순수한 것이다.
그의 손에 기타가 쥐어지면 금방 음은 살아 움직이듯 느껴지거나
빛나며 혹은 흐느껴 운다.
그는 느린 악장의 아다지오를 같은 스타카토의 악기인 피아노와 틀리게
멋진 가락의 흐름으로 노래하며 화음을 교묘히 엮어 나간다.
이러한 점은 기타라는 악기가 갖고 있는 특징인지 모르나
줄리아니의 끊임없는 연구와 풍부한 열정으로 말미암아 그 특성을 충분히 나타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줄리아니는 기타를 노래하도록 한 것이다.".
줄리아니가 기타를 위해 남긴 작품은 아주 대단한 분량이어서
200곡이 넘는다.
기타 독주곡,기타 실내악곡,그리고 3개의 협주곡 등이 그것이다.
19세기 초,비엔나에서는 공공연주회가 뿌리깊이 정착이 되었기 때문에
연주자의 재능과 명성을 얻기 위해서는 협주곡 연주가 큰 도구로 작용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줄리아니의 협주곡 A장조 op.30
(비슷한 시기에 작곡한 3개의 협주곡 중 첫번째 작품)은 놀랄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이 곡은 로드리고(Joaquin Rodrigo)의
"아란훼즈 협주곡(Concierto de Aranjuez)"과 함께
기타 협주곡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대규모과 관현악과 기타를 위해 작곡되어진 이 작품은
모차르트에 의해 정립된 3악장 구성의 고전적 형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내용적으로 본다면 아주 낭만적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갖는 간결한 구성보다는
차라리 훔멜,베버 및 롯시니에게서 느낄 수 있는 하모니와 멜로디를 구사하고 있다.
그외 작품으로는 헨델의 주제에 의한
"테마와 변주곡",기타 독주를 위한 "판타지아", "기타와 현의 오중주"등이 유명하다
[Bochum:scholle/06.03.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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