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stav Mahler (1860∼1911)

말러 / 교향곡 제10번

scholle 2010. 10. 26. 16:32

Symphony No.10 in F# major - Unfinished

말러 / 교향곡 제10번 Gustav Mahler (1860∼1911)

 

I. Adagio

II. Scherzo I

III. Purgatorio

IV. Scherzo II

V. Finale

 

말러의 마지막 교향곡이 되어 버린 10번이 작곡된 것은

1910년이 여름 기간 동안이다.

이 휴가 기간에도 그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알마가 토벨바트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말러는 토블라흐에서 여름을 보냈다.

 

이번에는 9번 교향곡을 작업할 때처럼

완전히 혼자 있었던 것은 아니며 그의 건강 때문에

나이 든 하인을 한명 두고 있었다.

 

건강이야 어떻든 그는 초여름까지 여전히 라이프치히와 뮌헨을

오고 가며 바쁜 지휘 일정을 보냈으며,

휴가 기간 동안에는 곡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10번 교향곡의 작업이 알마와 떨어진 기간동안 이루어졌고,

완성이 되지 못한 바람에 남겨진 대부분의 자료는

정확한 날짜를 추이하기 어렵다.

 

단지 그의 바쁜 연주 생활과 6월 초 그가 알마를 만나기 위해

토벨바트를 방문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6월까지는 큰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할 뿐이다.

 

반면 오히려 알마가 이 교향곡의 원고를

작곡가의 유언과는 달리 폐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곡의 스케치에 담겨 있는 말러의 심리적 갈등과 배경을 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말러의 극심한 갈등이 자신의 건강 문제로부터도 많이 비롯되었겠지만,

더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오랫동안 알마를 그려 왔던 발터 그로피우스가

드디어 토블라흐에까지 나타났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로피우스가 잘못 부친 편지 때문에 이미 말러는 그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가 찾아 왔을 때 알마에게 안내한 이도 말러 자신이었다.

말러에게 있어 알마는 정신적 위안의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알마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과 함께

말러의 상태를 심하게 뒤흔들어 놓았던 것 같다.

 

곡 자체가 물론 어둡고 냉소적이며 고별에 간한 것이지만

곡의 스케치에 놓인 낙서들이 그의 심한 갈등을 잘 설명한다.

예를 들어 4악장의 끝 부분에는

"당신(아마도 알마)만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거요,

아! 아! 아! 나의 음악이여, 안녕! 안녕! 안녕!'" 이라고 적혀 있으며,

 

피날레의 끝 부분에는

"당신을 위해 살고, 당신을 위해 죽으리,

알름쉬(알마의 애칭)!" 이라고 안쓰러울 정도로 괴로워하는

그의 감정이 담긴 메모를 발견하게 된다.

 

3악장에서도 여러 낙서가 있는데,

주로 '주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든지

모두 이루어졌도다' 등의 마태복음에서의 인용된 구절들이 담겨 있다.

 

피날레까지 스케치한 10번 교향곡이 완성되지 않았던 이유는,

겨울에도 말러가 이 곡을 다시 손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마는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

말러로 하여금 이 곡에 몰두하지 않도록 만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정말 그런지 갑자기 이 곡에 대한 흥미를 잃은 건지는

작곡가만이 알 일이다.

사실 말러는 자신이 완성시키지 못한 이 곡의 원고를 폐기시켜 달라고

알마에게 부탁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알마는 그의 유언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들고 다녔던 콘스탄체처럼

곡의 완성을 다른 작곡가에게 의뢰하기도 했고,

연구를 위해 원고의 복사본을 공개하기도 했으며,

1924년에는 이 원고를 출판하기까지 했다.

 

그녀가 진정 곡의 위대함에 경도되어 그랬는지,

말러의 한 곡이 그냥 사장되기 안타까워 그랬는지,

자신을 찬양하는 말러의 수많은 낙서를 외부에 알리고 싶어서 그랬는지,

이 모든 이유가 복합되었기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단지 브루노 발터를 비롯한 몇몇 관계자들이

작곡가의 유언을 무시한 그녀의 행동을 비난했을 뿐이다.

단지 그녀의 행동에 대해 어쨌거나 변명이 있다면,

처음에 그녀가 여러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모두들 이 곡의 상당 부분이 완성되어진 상태라고 인정을 했다는 것이다.

 

1악장과 2악장은 스코어 스케치로 거의 완성되어 있던 상태였고,

3악장 '연옥(煉獄)'은 간략화 된 스코어 세 장으로 남아 있었고,

마지막 두 악장은 네 단의 작은 스코어에 담겨 부분적으로 악기 지시가 되어 있었다.

 

악보가 이 정도로 나아갔기 때문에

학자들이나 다른 작곡가들이 연주용 악보로 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가능한 일이다.

가장 처음 이 작업을 시도한 사람은 알마 말러가 의뢰한 에른스트 크레넥이었다.

 

그는 첫 악장과 3악장 정도로 작업을 제한했고

그가 구성한 연주용 악보에 기초된 초연은 1924년 비엔나와 프라하에서 이루어졌다.

이 작품의 재구성을 위한 알마 말러의 노력이나 크레넥의 작업이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브루노 발터, 레오도르 아도르노, 에르빈 라츠 등은 첫 악장 아다지오마저

완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이 작업을 비난했다.

그들을 말러가 곡을 완성한 후에도 얼마나 많은 개정 작업을 가졌는지 일깨우면서

이러한 시도를 완전히 가치 없는 것으로 주장했다.

 

심지어 크레넥 자신도 남아 있는 악보가 작곡의 초기 단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 작품을 완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제2비인 악파 작곡가들,

즉 쇤베르크나 베베른, 베르크 등도 비슷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작업이 흥미로울 것이라고 생각한 작곡가는 많았고,

한참 세월이 흐른 후 1950년대부터는 여러 곳에서 본격적으로 작업이 이루어졌다.

 

 

영국의 조 윌러, 데릭 쿡크, 미국의 클린턴 카펜터, 레모 마제티,

독일의 한스 불쉴레거 등이 이들이다

다양한 작곡가들이 작업한 만큼 다양한 결과가 이루어졌지만

이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일반적으로 데릭 쿡크의 악보라고 할 수 있다.

 

데릭 쿡크는 자신의 작업에 대한 여러 우려에 대하여

남겨진 악보가 단순한 스케치가 아니라 완전히 전체 모습을 갖춘

레이아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완전히 새로운 작업을 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완성이란 것은

작곡가 자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했다.

말러가 만약 이 곡을 완성시켰더라면 평소 그의 작곡 성향을 보아

분명 많은 부분을 다시 보완하고 수정했을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런 점에서 데릭 쿡크는 자신의 작업이

'완성'이라든지 '재구성'이라기 보다는 '연주할 수 있도록' 혹은 악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든 것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이 방법을 '모방 작곡' 등으로 불렀다.

 

쿡크는 말러가 이미 작업한 것을 그대로 따라가려고 노력했으나

대위성부나 화성이 결여되어 있는 곳, 혹은 완전히 어떤 작곡 간격이 있는 곳에 대해서는

보완이 불가능했다.

쿡크는 처음에 '연주용' 악보를 완성한 후 말러가 자신의 작업에 했던 것만큼이나

여러 차례에 걸쳐 보완하고 수정했다.

쿡크의 작업을 검토한 많은 학자들은 그의 작업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는 말러가 남긴

마지막 작품을 연주는 할 수 있도록, 그것도 그럴듯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쿡크의 작업이 완전한 것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말러의 스케치를 직접 들을 수 잇도록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최종 판단은 그 다음의 일로 간주된다

 

[Bochum:scholle/26.10.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