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édéric Chopin(1810~1849)

쇼팽의 프랠류드 "빗방울 전주곡"이 탄생하던날

scholle 2010. 12. 10. 04:56

마요르카에서 쇼팽의 건강은 극심하게 악화되었지만

피아노를 치지 않고는 하루도 지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폴로네즈 a장조 군대(Op.40-1)와 녹턴 g단조(Op.37-1)

발라드 f장조 (Op.38)등을 작곡하고 24개의 프렐류드도 거의 완성한다.

 

그중 프렐류드 내림d장조 빗방울 전주곡(Op.28-15)과 관련해

조르주 상드는 저서 ‘나의 생애’에 이렇게 적고 있다.

 

‘비가 쏟아져 마차 지붕에 넘쳤다.

너무나도 무서운 어두운 밤길의 위험을 무릅쓰고 달렸다.

우리들은 환자(쇼팽)가 걱정할 것을 생각하며 마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도착하였을 땐 그는 정말로 생생하게 앉아

조용한 절망 속에서 눈물을 머금은 채 기막힌 자작의 전주곡을 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호수 속에 빠지는 것으로 착각했다.

무겁고 얼음장 같은 물방울이 일정한 속도로 자기의 가슴 위에 떨어진다고 했다.

 

그날 밤의 전주곡은...

빗소리에 넘친 것이었고 그 음이 사원의 지붕에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였다 할지라도

그의 작곡은..

그의 환상의 음악 속에서 그의 가슴위로 떨어지는

눈물로 바뀌어진 빗방울이었던 것이다.’

 

쇼팽의 창작태도는 여기서부터 변하고 있다.

전에는 외부 사람들에게 자기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태도였다면

이때부터는 자기 마음을 향해 음악으로 묻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이상 작곡을 할 수도 없고

병세가 악화되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파리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되었다.

 

1839년 10월 중순경 쇼팽은 1년만에 파리로 돌아왔다.

마요르카, 마르세유, 노앙 등을 거친 여행을 끝내고 파리에 온 것이다.

연인 사이로 떠났던 상드와 쇼팽은 이제 부부처럼 되어 돌아왔다.

 

그 후 1842년 무렵까지

쇼팽의 창작력은 정점에 달해 있었다.

그의 거작들은 거의 다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는데

이 시기에 출판된 작품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피아니스트로서도 이 무렵이 명수였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쇼팽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쇼팽은 피아노의 숙달자로서 기술적인 면에서만 빛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작곡가로서도 최고의 것을 창조했다.

그는 제1류의 인간이다.

쇼팽은 최고의 정신의 만족을 음악에서 구하려 했다.

그의 영광은 귀족주의적인 것이다.”

 

리스트는 쇼팽의 음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쇼팽의 수많은 왈츠와 발라드,

스케르초는 아주 극히 순간적인 시간에 불려 나온 것 같고

관 속에 넣어진것같은 순간적인 시적 숨결을 연상시킨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지나치게 이상화하여

너무나 섬세하고 부드럽고 가냘프게 짜내었기 때문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마의 세계에 가까이 간 듯이 느껴지게 한다.”

 

[계속되는 쇼팽의 명작]

 

왈츠 제9번 A장조 OP 69-1

이별의 왈츠 쇼팽의 사후에 공개된 그의 유품 가운데

‘나의 슬픔’이라는 글이 겉에 쓰여진 리본으로 매어진

낡은 봉투가 하나 발견되었고

그 봉투 속에서는 마리아 보진스키와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온

이별의 편지가 나왔다.

 

쇼팽은 그때까지의 자신의 심정을 담아 작곡한 이 왈츠곡 OP.69-1을

자신을 추억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마리아에게 보냈다.

실연당하기 전에 쇼팽이 느꼈던 사랑의 감정이

주로 담겨져 밝고 매력적인 이 곡을 쇼팽은 마리아에게 바치고

그 사본을 책상서랍 깊숙히 넣어 두었다.

 

그리고 그가 죽을 때 까지 연주되거나 출판되지 않았다.

악보에는

‘마리양을 위해 드레스덴, 1835년 9월’이라 적혀 있다.

 

후에 마리아는 이별의 왈츠라고 이름을 붙이고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했다고 한다.

이 이별의 왈츠와 편지는 20여년 동안 묻혀졌다가

쇼팽이 죽은 후에야 세상에 빛을 보였다.

 

왈츠 제5번 내림D장조 OP.64-1 강아지 왈츠

 

쇼팽의 연인이었던 조르주 상드가

강아지 한 마리를 길렀는데 상드가 나갔다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자기 꼬리를 따라 빙글빙글돌며 그녀를 반겨 주어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이런 강아지의 모습에 상드는 홀딱 반했고

쇼팽에게 이 모습을 음악으로 표현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주 빠른 속도로 전개되어 순간에 끝나버리는 특성 때문에

‘순간의 왈츠’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폴로네즈 제3번 A장조 군대 (POLONAISE “Militaire” OP.40-1)

 

폴란드에는 폴로네즈와 마주르카라는 대표적인 무곡이 있다.

폴로네즈란 16세기 후반 프랑스의 헨리 3세가

폴란드의 왕위에 즉위한 후 귀족들이 왕 앞에서 규칙적인 음악에 맞추어

행진하는 행사를 가지면서 비로소 형태를 갖추게 된 음악이고

마주르카는 농민의 생활 속에서 태어난 무곡으로 폴로네즈보다 훨씬 간소한

성격의 것으로 흙냄새가 나는 것이 많다.

 

1838년에 작곡된 폴로네즈 3번은

드높은 나팔 소리, 북소리를 연상케하는 화려함으로 인해

군대 폴로네즈로 알려져 있다.

쇼팽의 조국에 대한 애국심에서 작곡했다는 이야기에 맞게

쇼팽의 애국심에 대한 일화 중에서

 

그가 어느 날 친구인 티투스와 함께 조국으로 돌아가 싸울 것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상의를 했고,

이에 티투스가 괴로워하는 쇼팽에게

“조국을 위해 너는 무력이 아닌 예술이라는 수단으로 싸워라.” 라고

권유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폴로네즈 제6번 내림A장조 영웅(POLONAISE “Heroque” OP.53)

 

쇼팽이 쓴 6번째 폴로네즈인 이 곡은

“쇼팽의 폴로네즈를 들으면 운명이 가져다주는

온갖 부정한 것에 용감하고 대담하게 대항하는 확고한 발자국 소리를 듣는 것 같다.”라던

리스트의 칭찬이 꼭 들어맞는 곡이다.

 

일설에 의하면..

쇼팽이 막 완성한 이곡을 치고 있을 때

그는 갑자기 눈 앞에 투구를 쓰고 전투복을 입은 고대 폴란드 전사들의 행렬이

전진해오는 환각에 빠져 공포에 질린 나머지 방에서 뛰어나갔다고 한다.

폴로네즈 제 7번 환상(POLONAISE "Fantaisie" OP. 61)

 

쇼팽이 조국의 음악을 사용하여 예술로 승화시킨 분야는

폴로네즈뿐이 아니라 '마주르카'라는

약간 느린 4분의 3박자 형식의 춤곡들도 있다.

 

쇼팽이 파리에서 활동하던 당시

마주르카는 이미 전 유럽에 전해져 낯설지는 않았다.

쇼팽은 10대 때 폴란드 시골을 돌아다니며 사라져가는 민요를 채집했던

실력을 바탕으로 새롭고도 폴란드 민요의 정신이 뚜렷이 비치는

마주르카와 폴로네즈들을 썼고,

이로써 폴란드의 전통 음악, 마주르카와 폴로네즈는

세계 음악계의 한 부분을 차지 하는 장르가 되었다.

 

하지만 1845 -1846년 사이에 작곡된 이 곡은

폴로네즈이면서도 폴로네즈의 형식에서 떠난 것이어서

"환상 폴로네즈"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 곡을 들어보면 작곡가의 비통한 고뇌가 담겨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데,

이는 쇼팽이 조르주 상드와의 9년에 걸친 생활을 청산하고

실의에 차 있던 시기에 만든 곡이어서라는 해석이 있다.

 

4개의 주요한 테마로

구성되어 있는 이 곡은 형식과 양식이 대단히 자유롭다.

한편 이 작품의 정서적인 내용은 쇼팽 자신의 우수와 앞으로 올

폴란드 인들의 러시아에 대한 국민적인 투쟁을 표현한 것이라 할수있을 것이다.

 

음악사에 있어서 클라라와 슈만의 사랑 못지 않게 중요한 대목이었던

쇼팽과 상드의 사랑은 서로에게 창작의 원천이 되기도 했지만

서로의 영혼을 파먹는 마약같은 관계이기도 했다.

 

결핵 치료를 위해 상드와 그녀의 아이들과 함께

따뜻한 지방으로 이사까지 갔던 쇼팽은 오히려 건강을 더욱 해치고 돌아왔고,

이때부터 서로의 관계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었다.

 

전형적인 순정파의 모습으로 상드를 소유하려 했던 쇼팽의 욕심과,

한 남자에게 얽매이는 것을 거부했던 상드의 자유로운 영혼은

같이 할 수가 없었나 보다.

또한 병마 때문에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쇼팽의 환상의 세계도

감돌며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곡이다.

 

그래서인지 이 곡은 그의 생활이 반영되어 있는,

다시 말해서 그의 정신적인 불행이 잠재되어 있는

'병적인 내용'의 곡이라는 평을 듣는다.

상드와의 이별은 쇼팽에게 커다란 슬픔을 남겼고

그후 그의 음악들은 더욱 더 우울해지고 깊어졌다.

 

발라드 제1번 G단조 OP.23

 

시인 마에키비츠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쇼팽의 무한한 상상력과 로맨틱한 분위기로 발전시킨 작품.

 

슈만은 이곡에 대해

“그의 가장 거칠고 또 가장 독창성이 풍부한 작품이다” 라고 평했다.

발라드 제2번 F장조 OP.38

아담 마에키비츠의 시 윌리슨 호에서 암시를 받아 작곡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1836년에 작곡되어 슈만에 헌정되었다.

 

발라드 제4번 F단조 OP.52

 

쇼팽의 독특한 기법이 절묘하게 표현되고 있는데,

이곡에 대해 하네카는

“가장 명상적이며 서정적인 기분에 잠겨있을 때의 쇼팽” 이라고 평했다

빗방울 전주곡.. 마요르카.. 조르주 상드

마요르카는 아름다운 섬이다.

 

공기와 온화한 기후. 환상적인 풍경.

이슬람 시대의 유적들.

과거의 영화를 말해주는 앤티크들. 유리와 도자기 같은 특산품들.

더불어 골목 어디에나 즐비한 독특하고 이국적인 향취의 가게와 카페들.

 

그리고 계절마다 올리브. 야자. 종려. 선인장. 오랜지. 레몬 알로에.

장미. 석류로 뒤덮이는 곳.

그 외에도 이곳은 바다 그리고 별과 숲으로 가득한 지중해의 낙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부른 것은 비범한 두 예술가

소설가 조르주 상드와 음악가 프레드릭 쇼팽이 이곳에서 두해를 살았다는 사실이다.

 

상드는 연하의 시인 알프레드 뮈세와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사랑에 빠진다.

둘의 연애는 뜨거웠지만,

예민했던 두 사람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끝난다.

그런 상드에게 나타난 새로운 남자가 바르샤바에서 온 프레드릭 쇼팽이었다.

 

파리 살롱가에 나타나 사교게를 떠들썩하게 만든

매력적인 폴란드 피아니스트의 나이는 겨우 21세였다.

이미 폴란드에서 닦은 빼어난 피아노 실력과 누구에게도 뒤지지않는

낭만성으로 무장한 그가 파리 사교계를 정복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연주는 탁월 했으며, 음악은 독창적이었다.

그들의 사랑이 시작될 무렵, 쇼팽의 건강은 이미 좋지 않았다.

그러나 상드에게는 그의 심각한 천식도 보살펴야 할 사랑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미 상드는 두 아들과 연하의 애인 뮈세를 돌보지 않았던가?

어쩌면 쇼팽은 상드의 네 번째 아이었다.

상드가 쇼팽을 돌보는 것을 마치 모성과 같은 운명으로 받아드리고

요양을 위하여 파리 사교계를 떠나기로 한 것은,

마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가 알프레도를 위해 파리를 버린 것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상드가 병약한 애인을 위해 선택한 곳이 바로 마요르카였다.

그 섬은 그들에게 건강과 행복을 함께 줄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마요르카에서의 생활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상드는 이 곳에 두 아들도 함께 데려왔으며,

먼저 준비되었던 집이 그들에게는 최악이었다.

결국 네 식구는 4개월 동안 세 번이나 이사를 하느라고,

서로 사랑할 에너지를 잡다한 주변의 일에 다 낭비 해 버리고 만다.

 

그해 겨울의 마요르카는 생각보다 불편했고,

비가 너무 많이 내렸으며, 유난히 추웠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쇼팽의 창작열은 타올랐다.

 

바람이 많아 쇼팽이 '바람의 집' 이라고 불렀던 곳에서

그는 후에 최고의 작품이라 불릴 곡들을 써 나갔는데,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전주곡집이었다.

 

집 안에는 그들이 쓰던 가구와 빌려서 썼던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할머니는 이 곳에서 빗방울 전주곡이 탄생했다고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은 쇼팽이 쓰던 피아노로 음악회가 열린다고 한다.

 

쇼팽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6년 후에,

상드는 자신의 인생 행로를 적나라하게 그려낸 회상록

내 생애의 역사를 출판하였다.

 

거기엔 당시 상황이 섬세한 필치로 묘사되고 있다

"나는 쇼핑을 하기 위해 아들 모라스와 함께 외출을 했다.

그런데 비가 내리더니 점점 심해졌다.

게다가 갑자기 불어난 급류로 갈도 막혔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돌아서 평소보다 몇 시간이나 늦게 집에 도착했다.

집 지붕에서는 장대 같은 비가 기왓장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는 슬픈 표정으로 피아노에 앉아서 빗방울 소리를 피아노로 치고 있었다.

 

그는 눈물진 얼굴로 말했다.

'나는 이 비에 당신들이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소.

빗방울은 그의 가슴 속에서 눈물로 변했던 것이다.

그는 세상이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상드가 회고록에서 말한 빗방울 전주곡은 제 6번 B단조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낙숫물 소리를 가장 잘 연상시키는

제 15번 D플랫장조에 빗방울이라는 별명을 붙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에피소드 덕분에 전주곡집은

대중적으로 크게 유명해졌다.

그러나 쇼팽의 24개의 전주곡집 Op.28은

이 일화가 아니더라도 쇼팽 최고의 곡이다.

도리어 이런 에피소드가 그 예술적 가치를 가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No.15 in D flat major : Sostenuto

 

피아노, 마르타 아르헤리치 곡 들의 대부분은

상드와 마요르카 섬에 있던 2년 동안에 작곡되었으며

여기에는 상드와의 사랑, 아쉬움, 상드의 아들과의 갈등,

언젠가는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등이 모두 스며들어 있다.

 

리스트는 이 곡을 가리켜

"지금 까지는 없었던 방법으로 이룩된 새로운 곡들"이라고 말 하면서

"인간으로서나 예술가로서의 모두 빛나는 쇼팽의 창작력이

다 발휘된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No.15 Des-dur : Sostenuto Maurizio Pollini, Piano

 

이 곡은 쇼팽의 바흐에 대한 지극한 경외심의 표현이었다

. 평소 바흐의 건반악기 작품들에 최고의 경외심을 품었던 쇼팽은...

완벽하게 설계된 기하학적 도면과 같다.

 

모든 음표가 적재적소에 있으며, 하나의 낭비도 없다."고 말했다.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에서 영감을 받은 쇼팽은

거기에 붙이는 응답처럼 이 곡을 썼다.

 

그는 이 작품에서 장조와 단조를 각각 12곡씩 24곡으로 배치하는

정교한 계산 위에서 설계하였다.

대부분의 곡들은 2~3분 정도의 짧은 길이를 가지는데,

내용은 지극히 자유롭고 산뜻하다.

오페라나 극장음악에서는 본 곡에 앞서 전주곡이라는 것이 있지만...

쇼팽은 오페라가 아닌데도 여기에 '전주곡'아라는 멋진 어감을 차용했다.

 

사실 본 곡도 없이 전주곡만 24개 가 연이어 나오는 형식은

참신하다 못해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이 곡은 한 번에 모두 다 들어야 제맛이 난다.

쇼팽은 분명 자신의 인생이 전주곡으로 그칠 것을 알았기에

그토록 불안해 했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늘 미완성으로 끝나는 것이며,

어쩌면 인생이란 본론이 없는 전주곡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결국 상드의 아이들과 갈등이 심해지면서 쇼팽은 그녀와 멀어진다.

 

2년후 쇼팽은...

돌보는 사람없이 파리 방돔 광장의 호텔 방에서

서른아홉 살의 생을 마친다.

누이가 그의 임종을 지켰다.

장례식에 상드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Bochum:scholle/10.12.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