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이 주절이]

"고구마"

scholle 2007. 11. 19. 02:58

 

"고구마"

몇일전.. 집 사람과 함께 오랫만에 시장엘 갔었다.

시장이라면..

한국의 남대문 시장이나 동대문 시장처럼 사람냄새 물씬나는 그런 시장이 아니라..

최신식 건물들에 반짝거리는 대리석으로 만든

보도에 종류별 대로 집단 상가를 만든 ..

한번 가면 어떤 원하는 물건을 다 살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말하자면

수십만평의 종합 전천후 시장이다

(숲속에 파묻힌 탓에 산보 삼아 자주 가기도한다]

 

쇼핑을 어지간히 좋아하는(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집사람 때문에 시장엘 갔다가 과일이나 사볼 생각으로 식료품 가개를 들렸더니..

눈이 번쩍 뜨이는 고구마"(집사람 말을 빌리면) 한쪽 구석에

엄청큰 고구마가 위용(?)을 자랑하고 쌓여 있다

색갈도..

어쩌면 그렇게 싱싱하고 아름다운지..

생각하고 뭐고 할 여유도 없이 누가 가저갈까 싶어 얼른 집어 담는 집 사람에게..

여보!.. 그래도 한번 먹어 보고 맛이 있으면 더 사지,

그렇게 한꺼번에 많이 사면..

듣는등 마는등..

정신없는 집 사람의 성화에 덩치가 거의 한국무우" 만한

고구마를 일곱개나 사들고 왔다

시간이 없어..

미련 가지고 근무 나간 집사람 하루종일 근무 하면서 눈에 아른거릴 고구마를..

집사람 오기 전에 깨끛히 씻어서 정성 들여 삶아 놓고

집 사람이 퇴근 하자마자 고구마 파-티를 열었다.

 

입맛이..

어지간히 촌스러운(?)집사람은 외국에 살아온지 35년이 넘었건만..

나에게는 입을 살살 녹이는 그 많은 독일 음식들도 마다하고

죽자 사자 된장 찌개에 알타리 무우" 깻잎이나 상추쌈을 더 맛있어 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이 먹음직 스러운 고구마의 매력이 얼마나 했을까 짐작이 간다

사랑하는 여자의 옷을 벗기듯..

기대감으로 정성들여 조심 조심 덩치 큰 고구마의 껍질을 벗기니..

 

아.. 그 탐스러운 연분홍 색갈의 피부속이 눈을 아프게 자극한다

이것 저것 생각없이 한입 덥썩 물은 집 사람이 갑자기 조용하다

 

우거지 상(?)을 한...

그 모습을 사진에 담지 못한것이 한 스러울 지경이다

왜그래!.. 나도 한입을 덥썩 물었는데...

그 순간 내 입안의 모든 미각이 감각을 상실하고 사방으로 도망을 하며 아우성을 친다..

욱"하고 뱉어 버릴수 밖에..

이 무슨 맛인가??

홍당무를 삶아 먹어도 이 맛 보다야 백번 양반이다

 

한국의 그 달콤한 밤 고구마를 기대하며 사왔던 고구마..

세상에.. 이런 고구마도 있었나!? ㅊㅊㅊ...

 

6.25 전쟁이 터진 해에..

팥과 꿀을 잔뜩 넣은 찐빵을 해놓고 먹어 보지도 못하고..

준비도 없이..

맨몸으로 허겁지겁 기차의 지붕위에 매달려

코가 새까매서 부산으로 피난을 온 우리 식구는..

 

아버지와도 이산가족이 되 버리고..

덜렁..

피난 이라고는 왔는데 낫설고 물설은 타향에서 무었을 하고

먹고 살아야 할지 앞이 캄캄 했으리라..

평생을 고생을 모르던..

그 시절에 피아노와 성악을 했던 연약한 여자가 할수있는 일이 무었이 었을까.

 

영도 다리위에서 서성 거리던 우리 식구들..

가장 나이 먹은 형이 11살의 코 흘리개다

6살의 배고픈 내 눈에는..

영도 다리 밑에서 점"을 보는 장님들과 몇개씩 모아 놓고 파는 찐고구마..

지글 거리며 냄새 피우는 돼지 고기 장사꾼들만 눈에 선"했다

(지금도 집에서  사람들과 바베큐를 할때면 가끔씩 그때 생각을 하며 멍해 질때가 있다)

 

대구까지 점령 당한 그때 상황은 차라리 악몽 그 자체였다

올망 졸망한 자식들이 붙어있는 여자를 취직시켜 줄곳이 있을리 없었고..

생각다 못해 고아원의 선생 자리로 취직 자리를 찾은 어머님은..

 

자식들은 이제 이렇게 걱정없이 살아가지만..

그때의, 충격과 상처로 인해 병을 앓으시다가 피난살이를 끝내고 서울로 올라와

오래지 않아 내가 고등학교 2학년 5.16 이 터진날 세상을 뜨셨다,

 

피난살이 4년동안 부산의 사하 국민학교"에 다니던 나는

그때의 추억이 쓰라림과 아픈 추억으로 가끔 눈시울을 적시게한다

 

사하 국민학교"..

나의 어릴적 기억으로는...

Happy Mauntin 이라는 미국자선단체에서 운영하던

고아원의 앞산에는 그리 높지는 않치만 철쭉과 진달래 꽃이 만발하던 산이 있었고

가끔 공비나 산돼지가 나타나 사람을 잡아 가거나 가축을 헤치곤 했었다..

 

군인들이 엄청 고생하며 그지역을 지키고있었고

어린 나이에도 인정은 있었는지 보초서는 군인 아저씨들이 불쌍해서

늘 따끈한 고구마를 얻어다가 가만히 쥐여 주곤 했었다.

 

나중에는 군인 아저씨들에게 소문이나서

건빵을 쥐여주던 고마운 군인 아저씨들도 있었으니까,

 

독일에서는 고구마 구하기가 참 힘들다

더군다나.. 밤 고구마는 눈을 씻고 찾아 바도 없다

고구마!..

얼마나 고향의 정취를 안겨주고 향수를 느끼게 하는가!..

건강에도 좋치만..

나에게는 좌판 위에 몇개씩 모아 놓고 팔던..

삶의 과정에서 세상을 잘못타고 태어난 우리시대의 아픔들이

점점히 눈을 적시게하는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세대들이 처다보지도 않는 고구마가

나에게는 수많은 서글픈 삶의 의미로 다가온다,

 

[아울러 그시대에 비로도 코-트에 금태 안경을 끼고 히루(뾰족구두)를 신었던

인테리였던 어머님..

피아노를 치고 목소리가 고왔던 평생을 내 가슴에 살아계신 사랑하는 어머님...

그러나,한 여인으로서 너무나 불행했던 어머님께

이 글과 함께 사랑과 그리움의 눈물을 함께 보낸다]

 

[Bochum:scholle/18.11.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