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 세상] 205

매미 소리 / 산해경(山海鏡)

매미 소리 / 산해경(山海鏡) 선잠에서 깬 아침솔바람 소린 듯도 싶고,창호지에 치는 싸락눈 소린가도 싶다가차르르 차르르... 어린 나를 보릿단 위에 앉히고아버지가 숨차게 내리막을 달릴 때수레바퀴에서 나던 그 소리만 같아 혼자 계시는 어머니와 묵정 보리밭 옆아버지 무덤에도 어김없이 한여름은 찾아오고매미는 또 서러워져서 나무 등걸을 붙잡고 기다리던 세월보다 남은 날이 짧다고,턱없이 짧다고 통곡을 해도나는 그저 이명처럼 애절한 울음 더미에 떠 밀려서늘한 통증이 잠시 스칠 뿐.

[시인들 세상] 2015.07.13

향수(鄕愁) 정지용

향수(鄕愁)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시인들 세상] 2014.12.30

더없이 아름다운 장미 한 송이 / 도로시 파커

one Perfect Rose / Dorothy Parker 더없이 아름다운 장미 한 송이 / 도로시 파커 A single flow'r he sent me, since we met. All tenderly his messenger he chose; Deep-hearted, pure, with scented dew still wet- one perfect rose. I knew the language of the floweret; "My fragile leaves," it said, "his heart enclose." Love long has taken for his amulet one perfect rose. Why is it no one ever sent me yet one perfect limous..

[시인들 세상] 2014.12.29

눈 깊은 하늘 / 안희선

눈 깊은 하늘 / 안희선 지워지는 하루의 풍경은 저녁을 향해 날으는 새처럼, 머얼리 도망간다 노을빛 꽃들의 몸서리치는 포옹에, 떨어지는 가녀린 잎 이 모두 아름다운 허위(虛僞)라 해도 좋다 진정 후회없을 고백으로 벌판을 딛는 마지막 햇살처럼 너도 나를 사랑으로 기억할 수 있다면 비록 내가 없어져도 좋을 이 계절 어둑한 바람결 선혈(鮮血)에 물든 그리운 가슴을 보러, 눈 깊은 하늘이 내려온다

[시인들 세상] 2014.12.11

집으로 가는 길 -신경림

집으로 가는 길 -신경림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 길을.. 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콧노래 부르는 것도 좋을 게다 지나고 보면 한결같이 빛 바랜 수채화 같은 것 거리를 메우고 도시에 넘치던 함성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굳게 잡았던 손들도 모두가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 같은것 수백 밤을 눈물로 새운 아픔도 가슴에 피로 새긴 증오도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그것들 모두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시인들 세상] 2014.11.27

다시 나만 남았다 / 이생진

다시 나만 남았다 / 이생진 다시 나만 남았다 영혼을 쫓아다니느라 땀이 흘렀다 영혼을 쫓아다니는데 옷이 찢겼다 자꾸 외로워지는 산길 염소쯤이야 하고 쫓아갔는데 염소가 간 길은 없어지고 나만 남았다 곳곳에 나만 남았다 허수아비가 된 나도 있었고 돌무덤이 된 나도 있었고 나무뿌리로 박힌 나도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불쌍해서 울었다 내가 많아도 나는 외로웠다

[시인들 세상] 2014.11.26

호수 / 문병란

호수 / 문병란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무수한 어깨들 사이에서 무수한 눈길의 번뜩임 사이에서 더욱 더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시간의 변두리로 밀려나면 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 사이를 지나고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 버린 다음 비로소 만나야 할 사람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 바람같은 목마름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여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

[시인들 세상] 2014.10.08

저 가을 속으로 / 박정만

사랑한다, 사랑한다, 눈부신 꽃잎만 던져놓고 돌아서는 들끓는 마음 속 벙어리같이. 나는 오늘도 담 너머 먼 발치로 꽃을 던지며 가랑잎 떨어지는 소리를 낸다. 내사 짓밟히고 묻히기로 어차피 작정하고 떠나온 사람. 외기러기 눈썹줄에 길을 놓아 평생 실낱같은 울음을 이어 갈 것을 사랑의 높은 뜻은 비록 몰라도 어둠 속 눈썰미로 길을 짚어서 지나가는 길섶마다 한 방울 청옥같은 눈물을 놓고 갈 것을. 머나먼 서역만리 저 눈부신 실크로드의 가을이 기우뚱 기우는 저 어둠속으로.

[시인들 세상] 2014.10.05